첫 문장부터 부정적인 말을 쓰려니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되는데 (저 고양이 얼굴에 인상이라니) 나는 '심부름'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심부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시키는 일을 하여 주는 일'이지만, 대체로 이 단어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하여 주는'보다는 '시키는'에 방점이 찍히게 마련이다. 내 경우는 누가 굳이 시킨 게 아니면 딱히 하고 싶진 않은 일들이 심부름의 대상이었으므로 좋은 느낌이 들기가 어렵다. '심부름'의 항목이란 게 대체로 시키는 이가 하기 귀찮은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찮은' 이게 중요하다. 귀찮은데 안 할 수 없는 일. 누구한테 '시키고' 싶은 일. 적어도 내 기준으로 '심부름'에는 상하관계가 내재돼 있다.

*

어제의 술자리는 회사 밖에서 어떤 상을 받으신 모 이사님의 한턱 자리였다.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축하의 말을 전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고 웃고 떠들고 심각하고 하느라 다들 바빴다. 자리도 무르익고 시간도 늦고 해, 슬슬 일어나려는 찰나에 게스트가 왔다. 지금은 퇴사한 OB 선배로, 우리 회사를 워낙 오래 다녔던데다가  지금도 한번씩 우리 회사 일을 외주로 해서 우리와 얽힌 것도 많고, 모임의 주인공 이사님과 친분도 상당하니 그 자리에 초대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간단히 한잔 하고 가려던 것이 2차까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선배 옆에 앉았고 선배는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셈이 되었다. 나는 전에 그 선배에게 간단히 인사를 드린 적이 있지만 제대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어제의 자리에는 입사한 지 3개월 된 직원이 둘 있었으므로, 그 둘도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가만 보니 선배는 둘에게 인사를 받고는 슬쩍 말은 놓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초면에 반말, 제일 싫어요!) 자리 주인 다음의 연배로서 다른 이사님들께 "(성도 빼고) 누구 씨" 하며 반말을 하는 판이니 초면까지 따질 순 없었던 걸까?   

이런 분들의 특징답게 선배는 목소리도 팔 동작도 컸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꼭 이 회사에 함께 다니고 있는 분이 오신 것 같았다. 좌우를 넘나들며 대화하시는 것까진 좋은데, 바로 옆의 나는 귀도 아프고 팔에 맞을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랬다. 대화의 내용은 대체로 현재 이사님들(선배에겐 "누구 씨") 무시하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모르고 이사님들과 그 선배만 기억하는 옛날의 사건사고, 그리고 새로 온 사람들한테 함부로 말하기였다. 나는 점점 불편했고 인상은 더 구겨졌다. (이 예쁜 얼굴이!!!)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 선배가 나한테는 반말을 안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의 말을 안 시킨 것이지만 여하간 그랬다. 거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내 표정 때문이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선배가 불쑥 물었다. "저기... 몇 살이에요?" (올것이 왔구나.) 몇 살이라고 얘기했더니 단박에 돌아오는 대답은 "응, 내 조카 또래네." (역시) 체했을 때처럼 속이 불편했다. 이미 술맛은 떨어진 지 오래. 내가 별 말 없이 계속 인상을 구기는 데 열중하자 선배는 다시 몸을 돌려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던 선배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3개월 전 입사와 동시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담배심부름을. 그때 나는 갑자기 알게 되었다. 그 선배는 여자고, 나도 여자고, 맞은 편의 후배는 남자라는 사실이 현재 구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머릿속이 수세미가 됐다. 뭐야, 성이 다른 후배에게 더 함부로 하는 것은 그 옛날옛날에 살았다는 마초들의 근성 아닌가?

심부름을 '받은' 후배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지나갔겠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누가 웃으면서 "후배 씨는 담배 연기 질색인데? 가기 싫을 거예요"라고 말했으나 선배가 눈을 부릅뜨는데 할 말이 없었다. 담뱃값 달란 거냐, 이제 돈 버니까 그 돈으로 사와라, 라는 말에(제발제발 농담이겠지) 예예, 하면서 후배가 일어나는데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한참 뒤 돌아온 후배는 난감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선배 근데 나 지금 정말 돈 없는데." 한다. (제 표정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대로예요.) 내가 눈을 꼭 감자, 당황한 후배가 얼른 덧붙인다."돈 주시면 제가 사올게요." 그래서 내가 일어났다. "나도 담배 사야 하니까 내가 사올게." 나중에 생각해보니 대꾸가 그리 기지 넘치진 않았지만 난 적어도 '심부름'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표정이 불편한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나, 그리고 '입사 3개월' 두 사람. 젠장.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선배에 대한 존경과 배려와 후배에 대한 애정과 공감으로, 술꾼 대 술꾼으로 그렇게 만나서들 놀 순 도저히 없는걸까? 그런 세상은 언제 올까? 남자가 많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했을 젋은 시절의 그 선배가 있었기에 오늘 내 자리가 있을 테니 선배로서 대우하지 않겠다는 게 아닌데.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선배로선 그렇게 "쎄게" 나갈 수밖에 없었으려니 생각하니 한편 안쓰럽기도 하고,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허탈함에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배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가부장적인 태도라는 게 남녀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걸 환기하자니 이토록 험한 세상에서 정신 놓지 않고 여태 살아온 내가 새삼 기특하다. (긴 긴 긴 글의 끝은 언제나 그렇듯 엉뚱한 결론.)

 

 

 

 심부름 말 (김수정 글 백보현 그림, 상출판사)

심부름을 갈 때마다 자길 태워주는 말을 가진 소년의 환상적인 심부름 이야기. 물론 이 경우의 심부름은 "미션"이지만. 말의 비례가 좀 불안한 컷이 몇 컷 있지만 그 상상의 내용은 매우 따뜻한 그림책. 이토록 험한 세상, 내게도 이런 말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구나. (글 길게 써놓고 창피하니까 괜히 책 얘기)

=3=3=3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urnleft 2007-12-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옹~

네꼬 2007-12-07 13:00   좋아요 0 | URL
야옹야용, TurnLeft님 오래간만이에요. (살랑살랑)

Mephistopheles 2007-12-0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기 싫은 마지막 안간힘이라고 봐주면 장땡인 것을...^^

네꼬 2007-12-07 13:00   좋아요 0 | URL
-_- 근데 어쩐지 그 선배한테 안된 마음도 들었어요. 에혀.

라로 2007-12-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네꼬님~ 심부름말대신 심부름X를 찾으심이 빠르실듯~=3=3=3

네꼬 2007-12-07 13:01   좋아요 0 | URL
응? 뭘까 뭘까, 심부름X는? 쫓아가서 물어봐야지! =3=3=3

마늘빵 2007-12-0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네요. 저는 이미 나갔건 그렇지 않건 무조건 선배라고 초면에 반말하는 것도 얼굴 찌그러진답니다. 대학 때 과 엠티를 딱 한번 갔는데, 아주 기분이 안좋았죠. 술 잔뜩 취한 선배가 와서는 선배가 어떻고 후배가 어떻고 주저리주저리 말하면서 나의 동의를 구하는데, 입으로는 네, 네, 하면서 어찌나 기분 나쁘던지. -_-

네꼬 2007-12-07 13: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 그런 선배들 보고 있노라면, 야 진짜 긴장하고 살아야지, 스스로 훈련하지 않다가 나도 저렇게 될라 싶다니까요. 나이가 조금 많고 많이 많고의 문제가 아니구요. -_- 게다가 담배 심부름이라니, 내겐 거의 충격적인 수준이었어요.

비로그인 2007-12-0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불문하고,
성인들 사이의 말과 행동은 상호 존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시콜콜 연배를 따져 반말, 높임말을 정하는 것은 오래된 한국적 폐습이지요.
모두 다 같이 미국식으로 평준화하든지 모두 올리든지 하는 것이 좋겠지요.
저는 서양식이 싫어서 항상 존칭을 사용합니다.
나이어린 사람에게 존칭을 써서 거북하거나 곤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상호 존칭를 사용하며 술을 마시면 술자리의 분위기가 난잡해지지 않는 장점이 있지요.
하하.
다음부터는 그런 분과는 같이 술자리 같이하지 말아요, 네꼬님.


네꼬 2007-12-07 13:06   좋아요 0 | URL
선비 같은 한사님. 저는 이래서 한사님이 좋아요. 저도 모두 올리든지 모두 내리든지 하는 게 속 편하겠단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건 너무 헷갈리고 까딱하면 본의 아니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땐 낮춤말과 높임말 사이에서 묘한 애정도 생기니... 역시 중요한 건 말보다도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난잡한 술자리' 피하겠습니다. 점잖은 고양이들과 놀겠어요. (^^)

비로그인 2007-12-0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초면에 반말하는 사람 제일 싫어!! ㅡ.,ㅡ
내 기준에서는, '친한 사이 = 반말', '안 친한 사이 = 존댓말' 이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계속 존중해주고 싶을 때는) 반말하기가 무척 쑥쓰럽던데...(긁적)
어쨌든, 불편한 자리에서의 네팡이 한 일은 잘하신거에요.(쓱쓱쓱- 등 쓰다듬기) ^^
그리고 덕분에 좋은책도 알게 되고~

네꼬 2007-12-07 13:08   좋아요 0 | URL
'친한 사이 = 반말', '안 친한 사이 = 존댓말'
ㅋㅋ 역시 지구의 언어를 '배워서' 쓰는 우리 엘신님다워요. (역시 어학은 외우는 게 쵝오.) ㅋㅋ 이런 얘길 하는 엘신님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등을 쓰다듬어준다는 솔직한 표현을! (그래요, 강아지나 사람이면 머리를 쓰다듬겠지만.... ^^ 좋댄다.)

비로그인 2007-12-08 15:25   좋아요 0 | URL
아~? 제 표현이 틀렸나요? 틀린건가요! ㅜ_ㅜ (어디가?)
등...쓰다듬기는....엄,,그러니까 잘했다는 의미...

비로그인 2007-12-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대해 한 마디- 쓴 사람이 가장 힘든 법입니다. 읽는 사람은 그다지 힘 안들어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대신 제가 고마워하며 읽을게요,예쁜 네꼬님....

네꼬 2007-12-10 15:03   좋아요 0 | URL
하하핫. 언제나 다정하신 승연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짧게 쓰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진짜 좋은 페이퍼인데...
전 내공이 너무 부족해요. =_=

보석 2007-12-0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고 싶은 거..라고 애써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상쾌한 풍경은 아니네요. 그래도 네꼬님이 잘 처신하신 것 같아요.

네꼬 2007-12-10 15:04   좋아요 0 | URL
앗 보석님, 오래간만이에요.
저도 그렇게.... 애써 생각했는데, 영 비린내가 가시질 않더라구요. -_-
좀더 재기발랄한 방법은 없었을까요? ㅠ_ㅠ

마노아 2007-12-0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사람과 함께 하는 회식 싫어요.ㅡ.ㅡ;;;
반말 높임말이 딜레마 될 때가 있죠. 우리나란 또 빠른 00이런 식으로 학교 일찍 들어간 사람들이 어중간해지잖아요. 이래저래 저도 존댓말이 좋아요. 오늘 컨디션은 괜찮아요, 네꼬님?

네꼬 2007-12-10 15:05   좋아요 0 | URL
저녁 시간을 내 의지대로 보내지 못하는 것만도 맘 상할 판에
원치 않는 자리라서 더 울적했어요. 저도 우리 나라의 빠른 어쩌고 재수한 어쩌고 이런 거 너무 애매해서 싫어요. 그냥 서로 높여주면 딱 좋겠는데. 엥-
(오늘은 건강검진 하고 왔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치니 2007-12-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나에게 초면부터 반말하는 것도 싫지만, 별로 말 놓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언니라는 이유로 자꾸 말 놔달라는 부탁 듣는 것도 싫어요.
아으, 우리나란 왜 이리 나이랑 성별이 중요한 걸까요!

웽스북스 2007-12-07 19:36   좋아요 0 | URL
치니님 말에 완전 완전 동감이요!

네꼬 2007-12-10 15:07   좋아요 0 | URL
치니님.
아으- (아으, 간만의 속 시원한 감탄사 아으!
그러게 말이에요, 안 그래도 중요한 게 넘 많은 판에!!! (저도 '선배'라 불러야 할 사람이 '언니'라 부르는 것 좀 불편해요. 난 그의 '언니'일 생각이 별로 없는데 말예요.)

웬디양님.
퍼스나콘이 예쁜 웬디양님, 안녕하세요? 우리 셋이 동감이네요. 계 합시다! (응? 이건 아닌가?)

세실 2007-12-0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호감가는 사람이 반말 하는건 괜찮은데, 별로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반말 하면 바로 욕 나오죠. "저게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ㅎㅎ" 물론 속으로만요.
술자리에서 목소리 크고, 반말하고, 동작 큰 사람 젤 싫어요.

네꼬 2007-12-10 15: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 엄밀히 말하면 "저게 날 언제 봤다고 반말하고 난리야?"죠.
ㅋㅋ
이건 오래전 혈기방장 네꼬 씨일 때 일인데요, 전 저보고 "내 셋째 동생 같아서" 말 좀 놓겠다는 아저씨한테 "응, 그럼 나도 말 놓는다?"한 적이 있어요.
=3=3=3

2007-12-15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0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