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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ㅣ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평점 :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산 적이 있다. 실제로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살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체온을 낮추고 잠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얘길 어디서 듣고는 또 숙연해져서 그 생각을 접었지만,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속으로는 그래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겨울잠, 겨울잠 자고 싶어. 세상에 왜 겨울이 있는 걸까? 크리스마스 캐럴만 아니라면 세상에 겨울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캐럴을 여름에 들어도 되잖아? 필요하다면 봄, 여름, 가을 중에 한 계절을 포기해도 좋으니 겨울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나는 겨울이 싫다. 그래도 겨울에 (캐럴 빼고) 딱 하나 좋은 것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따뜻한 곳에 모여 앉게 되고, 좋으나 싫으나 몸을 붙이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는 것. 어쩌면 체온보다 따뜻한 것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겨울과 어울리니까.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어서 우물에 미숫가루를 털어넣었다가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삼학년)는, 낄낄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박성우의 시집 『가뜬한 잠』은 문태준 시인의 말마따나 “보태지 않되 친절하다.” 나 같은 허풍쟁이 고양이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담백하고 소박한 언어들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의 시들은, 그 솔직함 때문에 시라기보다 이야기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탕을 흘리면 대충 주워먹던 촌뜨기가 호텔에서 선을 보다가 떨려서 커피를 떨어뜨렸을 때 ‘그녀가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 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하는 빙긋, 웃음나는 이야기(버릇), ‘신발의 반도 안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떼 화단으로 가서 ‘손자에게 밥 먹이듯’ 남은 밥과 숭늉을 나무들에게 주고 거길 얼씬대는 고양이를 돌아보며 ‘예끼, 웃는’ 노인 이야기(도원경), ‘오지 않은 한 명의 하객’ 아버지를 만나러 가느라 신혼 여행을 포기했던 이의 ‘네 번이나 속옷을 벗어던’진 신혼 첫날밤 이야기(신혼 첫날),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는 알듯 모를듯한 이야기(물의 베개)까지. 조곤조곤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가만 그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니, 시인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좋은 귀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다. ‘김일무선’이라는 동네 전파사에서 늙은 주인에게 낡은 선풍기를 받아와,
머리맡에 라디오 켜듯 선풍기 틀고 엎드려
왜 하필 김일무선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육칠십 년대에는 제법 근사하기도 했겠지?
어림짐작으로 주파수를 맞춰보면서 나는
서른다섯 내 나이 무렵의 김일씨에게 전파를 날려보았다
치익 치지직 치직 운이 좋게도 답신이 왔다
시를 쓰다가 그냥저냥 늙은 나는
서른다섯을 건너는 가전제품수리공 김일씨와
무선으로 교신을 나누며 찜통더위를 식혔다
-「김일무선」부분
이러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한여름 꽃들의 소리도
니 뺨이 더 뻘겋다 니 뺨이 더 뻘겋다 뒷마당 장독대에는 분홍 주홍 빨강 봉숭아꽃들이 시끌벅적하니 피어올랐다
-「식은밥단술」부분
듣는다. 그리고 제 속에서, 고추처럼 아무리 짜내도 맵기만 한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가 나는 것도 잘 듣는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이제 곧 12월이다. 겨울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누구나 몸과 마음을 덥힐 필요가 있다. 아랫목 이불에 옹기종이 붙어 앉아서 귤이라도 까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다. 우리 언 발을 언 손을 녹여 줄 따뜻한 시를, 읽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나를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턱을 괴고 엎드려 내 이야기를 들어줄 그 시집이 여기에 있다. 겨울잠이 아니라 ‘가뜬한 잠’으로 우리의 겨울을 나게 해줄 시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