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할머니 평화그림책 1
권윤덕 글.그림 / 사계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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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한중일 세 나라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함께 만드는 그림책 시리즈 '평화그림책'이 있다고 한다.
한,중,일 3국 공동 출판은 어린이책으론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는데 2005년 10월 ‘근대 일본의 동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침략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죄와 보상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는’ 일본 작가 4명은 한,중,일 3국의 작가들이 함께 평화의 가치를 담은 그림책을 만들어 동시 출판하자는 제안을 한국 작가들에게 해왔고 이에 동의한 한국과 중국 작가들이 모여 5년만에 첫 작품을 만들어 내니 바로 첫번째 책 <꽃할머니>이다. <꽃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그림책 작가 권윤덕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도 매우 감추고 싶은 문제였다.일본군 위안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강제로 집단적으로 또는 기만에 의해 징용되어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하는데 위안부 여성들에게는 씻지 못한 치욕으로 기억되고 해당 국가에선 자국의 여성이 당한 일에 대해 이를 막지 못한 자괴감에 일본은 가해자로써 이런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무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중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세계 최초로 밝혔고 그 이후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 추악한 진상이 들어나게 된다.

이 책 꽃 할머니는 우리 근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열세 살 무렵 언니와 함께 나물을 캐러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게 끌려가 대만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꽃 할머니는 말 못한 성폭력의 고통을 당한채 반 미치광이가 되고 전쟁이 끝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절에 맡겨진다.그리고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동생을 만나 보살핌을 받다가 동생이 먼저 세상을 뜨고서야 꽃할머니는 정신이 돌아오고 이후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어린시절 언니와 풀을 캐던 꽃 할머니>

<잔인한 일본군에게 납치되고>

<좁은 방에 갇혀서>

<당시 위안부들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일본군인들이 줄을 서있다>

<당시 일본 위안부들의 현황-일본이 전쟁을 벌인 각지에 다 있다>

<동생이 죽은후 정신을 차린 꽃 할머니>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될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성인들도 쉽게 감당 못할 내용인데다 잔인한 성폭력과 관계된 내용이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 문학에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내용인데다 단순한 글만이 아닌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이라 궁금하기까지 했다.
실제 책속의 그림은 그 잔인했던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물론 아이들이 볼 내용이기에 당연히 그래야 겠지만 그래도 전쟁 무기들 속에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누워있는 여인과 꽃이 힘들었을 위안부 생활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마음 한구석에서 울컥하는 감정시 치 솟아 오르며 일본에 대한 증오가 끓어 오르는 것을 숨길수가 없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도 그런한데 실제 권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을 들은 작가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작가 역시 그 증오심을 일본 군인에 대한 복수심을 그림으로 옮겼고 그 스케치를 지인들에게 보여주니 이런 끔찍한 그림책을 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고 싶어 하겠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이처럼 가슴속에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삭이며 열 차례 넘게 수정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꽃 할머니라고 한다.
그 결과 아이들이 보더라도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도 내용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처절하도록 서글픈 꽃이미지에 보이는 비극적인 모습이 절제된 그림 속에서 눈물이 나면서도 볼수 있는 아름답게 형상화된 그림책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꽃 할머니인것이다.

<꽃할머니>를 일본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실에서 읽어주자 아이들은 할머니의 아픔에 공감을 표했다는데 그중에 “일본이 그런 일을 한 것이 충격적인데 이제까지 우리가 몰랐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에요.”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무슨 말인가 하면 일본 정부는 소극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 성명만을 발표하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자 현재 일본 청소년들에게 전혀 알려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꽃할머니>는 이처럼 한국은 불편하기에 일본은 추악한 진실이기에 후대에 감추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하지만 권 할머니의 지금 세상에는 그런 일 없어야지. 나 같은 사람 다시는 없어야지.내 잘못도 아닌데 일생을 다 잃어버리고...처럼 후대의 아이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추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필히 읽혀야만 될 책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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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2011-06-21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꽃할머니책을읽으니깐너무슬퍼그리고꽃할머니힘네세요파할팅

카스피 2011-06-22 22:31   좋아요 0 | URL
네,서글픈 역사의 한페이지라고 할 수 있죠.더 서글픈것은 꽃 할머니들이 한분 두분 돌아가시면서 우리들의 뇌리속에서도 사라져 가신다는 거죠 ㅜ.ㅜ
 
고양이가 맨 처음 cm를 배우던 날 아이세움 열린꿈터 6
김성화.권수진 지음, 노인경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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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 제목의 cm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학과 관련된 책이다.사실 어린아이 중에서는 수학이라면 질색하는 아이들이 무척 많은데 고양이가 맨 처음 cm를 배우던 날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수학과 친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표지>

사실 아이들에게 미터법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현재 지구에서 사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길이 단위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상당수 국가들이 쓰는 미터법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과 미국이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영국 단위(British unit)로 불리는 피트법이다.물론 그 이전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사용하던 촌, 리, 자, 척, 길이라는 단위와 고대 이집트등에서 사용하던 큐빗등의 단위가 있었지만 상당히 주관적으로 이것은 피트법도 매한가지다.실 예를 들면 12인치는 1피트, 3피트는 1야드, 1760야드는 1마일이니 10진법 체계인 미터법에 비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책속에도 들어 있는데 생쥐는 아주 옛날에는 몸의 길이를 이용했는데 짧은 길이는 손가락, 손, 팔이나 발로,마을과 마을같이 먼거리는 발걸음을 이용했다고 설명하면서(이것이 실제 피트법 단위의 기초임을 알 수있다),중요한 것이기에 왕의 몸을 사용했지만 왕이 죽은후 에 다음 왕의 몸길이를 이용하니 서로 제 각각이여서 혼란스러웠다고 쓰고 있다.

<고양이 키를 재는 단위가 제 각각이라 넘 귀찮다^^>

그래서 200백년전 과학자들은 과학과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표준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미터법을 개발하게 된다.
200여년 전, 과학자들은 1미터는 지구 둘레를 4,000만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자고 정했다.
1793년: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의 1/10,000,000.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 원기의 길이.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의 길이.
1889년: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 원형의 길이.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
이후 미터법은 이와 같이 변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해주면 아마 기겁을 하고 수학에서 멀어지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고양이가 맨 처음 cm를 배우던 날은 명랑하고 게으른 고양이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생쥐를 등장시켜 밀리미터, 미터, 킬로미터, 그리고 제곱미터, 킬로그램등 우리 실생활에 쓰이는 단위들을 딱딱한 수학 계산식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펼쳐낸다.



<고양이가 자기 멋대로 cm단위를 부른다>

고양이와 쥐는 자기들의 몸으로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와 마을의 길이,지구의 길이,지구와 태양의 길이,조금씩 멀어져가는 우주이 길이도 재보게 된다.





<ㅎㅎ 놀라운 숫자의 세계>

어른들도 수학은 사실 매우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관이 은연중에 베어있다.그런 선입관이 또한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전달되어 아이들이 수학을 어려워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하지만 이책은 수학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명랑하지만 게으른 고양이를 등장시켜 아이들에게 수학과 과학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하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다.
아이와 어른들이 모두 함께 읽어도 무척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지만 그림체가 좀 딱딱하다.고양이 그림을 고양이 도우미의 그림처럼 귀엽게 했다면 아이들이 더 좋아했을텐데 이점이 좀 아쉽다. (사실 이 책의 고양이도 귀엽지만 고양이 도우미의 그림체가 넘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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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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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 학교 시절에 교회에 다닌적이 있다.집안에서 기독교를 믿는이가 아무도 없었지만,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교회 다니던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서 뭣도 모르고 부활절 달걀을 맛있게 먹고-그때 달걀을 까면 껍질에 묻어있던 색소가 안에 배어서 파랗고 노란 알록 달록한 모습이 너무나 이뻐 안먹고 손에 꼭 쥐고 있으면 손까지 물들은 기억이 난다.지금 생각하니 안좋은 공업용 색소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재미난 연극도 보고,크리스마스때는 성탄 선물도 받았던 즐거운 추억이 새록 새록하다.
이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가면서 교회에서 멀어지게 되었지만 내가 다녔던 교회와 당시 성도들에게는 아직도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 참 이제부터 기독교란 말대신 개신교란 말로 대체해야 겠다.기독교란 말에는 카톨릭+그리스 정교+성공회+프로텐스탄트가 포함된 말인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미국에서 건너온 프로테슨탄트 즉 개신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마음 아프게도 제가 예전에 알았던 마음 따스한 개신교와 교회는 어디가고 타 종교를 배려하지 못하는 전투적이며 보수적이어서 이른바 꼴통 소리까지 듣게 되는 행동을 많이 하는 기독교,그래서 개독교와 먹사라는 비난을 듣는 그런 개신교를 여기 저기서 만나게 된다.(위에서 개독이란 말을 들으므로써 카톨릭마저 싸잡아서 비난을 받게 된다)
사랑과 무욕-부자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 절 땅밣기를 하지 않나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그런다고 하면 말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 놓고 앞장 서서 불교등 타 종교를 비방하고,10조 받아서 2천억짜리 대형 교회를 증축하고-과연 예수님이 대형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쳤는지 성경을 암만 뒤져봐도 없더군요-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자식에게 대형 교회를 세습까지 하며 이른 비판하는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내쫒기까지 하니 왜 이 정도까지 변했나 하고 서글픈 생각까지 들 정도다.

어려서 항상 교회의 목사님에게 듣던 이야기중의 하나가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이었다.그러면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버려야지.." 이라는 말도 함께 듣곤 했는데,일부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개신교인들은 소금과 같이 세상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맛을 잃어버리고 무가치하고, 무기력해 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개신교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대해 귀를 닫으며 오히려 개신교의 교리를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개신교를 폄훼하려고 한다고 반박한다.하지만 모든 개신교인들이 이런 비판에 대해 무감각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개신교 내부적으로 일부지만 교회 내의 자성의 소리 또한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래서인가. 출판물 가운데도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 왕왕 출간되고 있는데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가 그런 책중의 하나이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은 책 제목속에 책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저자인 김두식은 검사출신 법대교수로 저자가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자신이 몸 담았던 법조계를 비판했듯이, 개신교도인 저자가 현 시대 한국사회의 개신교를 비판하고, 어떻게 바뀌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를 과감하게 쓴 책으로 단지 개신교도만 위해 쓴 책이 아니어서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고 설명적으로 쓰여져있다.

책속에는 개신교인들이라면 일반인들 읽지 못하게 하고 싶은 내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들어는데 저자 역시 책을 쓰는 일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책속의 내용들은 개신교도라면 어쩌면 한번씩은 생각보고 부끄러워 할 그런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교회 본당에 환풍기를 설치한 집사님은 목사님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장로에 피선되고 설교자는 설교만 하고, 교인들은 그저 듣기만 하는 영화관식으로 교회의 구조가 이루어 진다.

이후 교회에서 성장해 가는 동안 저는 여러 직분을 정하는 데 돈보다 더 큰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지위였습니다. 사회적 지위에 비하면 돈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호사인 사람은 교회에서도 똑같이 변호사로 대접받고, 의사인 사람은 교회에서도 똑같이 의사로 대접받습니다. 아무리 신앙 연륜이 짧아도 이른바 ‘사’ 자 돌림 직업을 가진 사람은 쉽게 목사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며, 교회 의사 결정 구조에도 남보다 훨씬 빨리 접근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15 p)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나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칩시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딸려 있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우선 목사님과 교인들이 장례식장을 방문해 장례를 집전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겠지요.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남겨진 가족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두 배의 돈을 집어넣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남겨진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적 생계의 문제는 더 이상 교회의 책임이 아닙니다.……죽은 남편이 보험을 많이 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장례식장에서 듣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과 교인들은 “하나님이 미리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며 기쁨을 나눕니다. “세상에 없어도 자식을 유학 보내고 결혼시키는 아버지가 있다”거나, “10억을 받았습니다”라고 아내가 조용히 고백하는 보험 광고 속의 세상에 교회도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보험이나 많이 들어 놓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272-273p)

우리 담임 목사님들은 30~40년전 빈손으로 어떤 지역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 끝에 잘 지은 본당과 교육관, 주차장을 소유(?)하게 되셨습니다.재미있는 것은 우리 목사님이 강사로 나가시는 바로 그 상대방 교회의 목사님들 만이 우리 교회 부흥회 강사로 오신다는 점입니다.미국가서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미국 박사가 되는 참 신기한 일이지요.
열심히하면 언젠가 부목사에서 담임 목사로 올라갈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불투명합니다. 이런 평균적 교회의 담임 목사님 아들이나 사위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친하게 지내는 목사의 아들을 담임 목사로 영입함으로써 자기 아들의 미래를 보장받는 편법도 유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왜 그렇게 늘 부동산 투기에 목말라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읽기어려운 성경은 언제나 이를 해석해줄 '브로커'가 필요합니다.
서점의 기독교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보면 온통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상한 책들만 넘쳐 납니다.

항상 남을 용서하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과는 반대로 세상과 마찬가지로 돈 있고, 힘 있고, 권력이 있는 신도가 인정받는 그런 곳,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설교를 들어도 그저 듣기만 할 뿐, 오로지 주일 날 교회에서만 섬기고, 봉사하고, 기뻐하고,감사할 뿐인 교인들, 교회의 세습과 여신도와의 간통 등의 목사님들에 부정이 만연한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바로 외부에 비쳐지는 개신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저자는 이런 개신교의 현항에 시퍼런 메스를 가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 교회가 걸려있는 각종 질병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칼빈이나 루터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저자가 출석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까지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그러면서 크리스찬으서의 애정을 담아 개신교 질병의 원인과 그 대안에 대해 개신교인 답게 성경을 샅샅이 뒤지고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데 성경을 기초로 한 해결 방안-교회가 교회답게 회복하자-을 제시한다.저자의 처방전은 개신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도 파격적이고 신선할 정도로 다양한 개혁과 실천을 처방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작가 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헌금 나눔을 제시한 나눔의 공동체,
-목사,장로 임기제를 도입.
-일정 연령이 되면 경제적 조건 없이 장로,권사로 칭하는 호칭제를 실시
-사회적 약자들이 머물수 있는 참 교회
-실직자들이나 사업 실패자들에게 재기 지원금을 마련해 주는 교회,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교회등등
만약 이 정도의 개혁만 이루어져도 서울 곳곳에 빼곡히 있는 교회를 허가제로 하거나 아니면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는 '법인'으로 등록하여 감사체제를 두거나 둘중에 하나를 해야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안티-개신교인들을 충분히 설득할 성 싶다.

개신교도인 저자기 철저한 개신교의 입장에서 반성한 이 책은 많은 개신교인들 그중에서도 대형 교회 목사님들과 소망 교회 장로님들(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분)이 특히 읽을 만한 책이다.그리고 개신교 교회나 목사들의 예수님을 이념에 반하는 행동에 질려서 혹시 지금 다니는 교회 혹은 개신교를 떠날 생각을 가진 일반 신도라면 더더욱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무신론자를 보다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도와줄주 아는 좋은 개신교인을 많아지는 것 또한 이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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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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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는 제레미 리프킨의 신작으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에 대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리미 러프킨의 작품은 엔트로피,노동의 종말,육식의 종말,소유의 종말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 공감의 시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보니 읽는데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솔직히 머리속에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전작인 <유러피언 드림>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고하며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했다면 공감의 시대 에서는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저자는 20세기가 석유라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경제 체제였지만 세계화가 정점에 이르러 기존의 경제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21세기는 다윈식 적자생존 대신에 공감이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지금 세계는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공감의 시대 1부 첫 대목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14년 12월24일 저녁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땅거미가 깔릴 무렵 독일군 병사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촛불을 붙이며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고 넋을 잃고 바라보던 영국군 병사들이 박수를 치다 캐럴을 부르며 화답하며 양 진영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나와 서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수천,수만의 병사가 그 뒤를 따랐는데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담배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추억을 교환했다.병사들은 다음날 아침 태양이 전장위로 솟아올랐을 때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르프킨은 이렇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 아니라 공감하는 동물이라고 강조하면서 공감하는 인간이 인류문명을 진화시켰으며 공감해야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즉 호모엠파티쿠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책 도입 서두에 르프킨은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라 공감하는 동물이라 주장에 대해 처음에는 선뜻 공감하기가 어려웠다.저자는 책속에서 많은 실 예와 이론을 곁들여서 인간의 본성에 공감적 특성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고 이런 공감의 능력이나 공감의 문명이 처음에는 가려져 있다가 지속적으로 발현되어 왔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에 대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과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불평등과 반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인류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잘되어 있을 경우 질투와 시기를 보내는대 노력(?)여하에 따라 타인의 것이 내것이 될수 있기에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발전해온 인류에게 공감의 씨앗이 있다는 좀 주장은 좀 우숩기도 하다.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공감의 시대’는 원제가 영어로 ‘empathic civilization’로 직역하면 “감정이입적 문명”이라는 뜻이다. ‘empathy’는 남의 아픔에 대해 동정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 정말 남의 아픔이 내 아픔 같은 감정이입 수준까지 가면서 같이 아픔을 느끼는 수준의 경지를 말하는데 과연 인류가 타인에게 그런 감정 이입 수준의 공감을 언제 가졌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몇 몇 뛰어난 사람만이 그런 경지를 가졌을 뿐이지 않는가!

저자는 책속에서 또다른 시각을 우리에게 던져주는데 바로 인류 역사의 발전이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의 양과 질(효율)이 늘어나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이 과정에서의 부산물로 ‘엔트로피’ 증가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인류가 기술적으로 진보할 때마다 공동체의 크기는 커졌지만 환경이 복잡해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만큼 인류의 에너지 사용은 많아지고 자원은 더욱 빨리 고갈된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무슨 말인가 하면 석유를 사용할 경우 에너지를 얻으면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데 비록 이산화탄소에 내재된 에너지 총량은 석유와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 가능한 상태(석유)에서 사용 불가능한 상태(이산화탄소)로 변환이 일어나면서 에너지는 고갈되어 간다는 것이다.
화석 에너지의 고갈과 그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재앙에 가까운 기후 변화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치솟는 엔트로피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21세기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임에서 윈윈 전략으로, 폐쇄성에서 투명 경영으로, 이기적 경쟁에서 이타적 협업으로, 엘리트 에너지에서 재생 가능한 분산 에너지로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변하고 있으므로 인간 이해에 기초해 앞으로는 분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협업의 경제 체제에 동승한 개인, 기업, 나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8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을 도서관에서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읽고 그 내용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자의 말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모르지만 19세기 20세기에 걸쳐 이른바 서구 선진국들이 자행하던 제 3국가의 화석 자원 약탈을 통해서 발전했던 현재의 자본주의는 서서히 끝나가므로-즉 화석 자본도 고갈되고 총칼로 남을 약탈할 수도 없으므로-인류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전(全)지구적 경쟁을 심화시키는 현재의 문명에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앞당기자고 말 하는 것 같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로 공감이란 말을 하고 있지만 서구 독자들의 입장에서 공감이란 말이 마음속에 와닿고 수긍이 갈지는 모르지만 솔족히 그들 눈에 변방의 한쪽끝에 있는 한국 독자의 시각으론 솔직히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내용이다.
책속에서 말하는 제 3차 산업혁명과 에너지 혁명을 위해 이른바 서구의 글로벌 기업들이 벌이는 활동은 또다른 의미의 제 3국가 수탈-과연 그들이 제 3국가에 공감을 가지고 많은 돈을 투자한 비즈니스 사업을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로 접근하는것일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공감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은 ‘이해’가 간다.또 그렇게 밖에 될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다자간 시대에 과거처럼 어느 일방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이란 키워드로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조금은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공감의 문명이 과연 엔트로피 증가라는 괴물과 충돌을 벌일 때 지구촌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아직 저자도 확실히 자신하자 못한다는 감을 받게 된다.

800페이지에 어찌보면 그닥 재미없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읽어 볼 책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이 책을 읽고 미래학자의 주장에 대해서 얼마나 공감할지 여부는 책을 읽은 독자 각각의 몫일 것이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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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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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 준 참으로 독특한 이름이다.한국에서 쓰이는 복성은 대게 중국에서 건너온 성인데 혹자는 아마도 이 이름을 듣고 이상무 화백의 만화 주인공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이상무 화백 만화의 주인공이 바로 독고 탁과 김 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 이 이름을 듣고 최인훈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은 상당히 한국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임에 거의 틀림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북한에서 출생하여 학교를 다니다가 월남하여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는 인물로 북한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누이 등 여러 가족은 생사를 알지 못하고, 함께 월남한 아버지는 남한에서 죽은 정말 남한에 피붙이 하나없는 고독한 상태의 인물인 주인공이 잃어버린 혹은 정립된 적이 없었던 ‘자기 자신’으로 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이 바로 독고준이기 때문이다.
회색인은 작가 특유의 관념적 경향이 엿보이는 에세이 스타일의 독백이 주를 이루며 그간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실험적 소설로 4•19혁명 직전을 배경으로 역사적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독고 준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분단현실과 민족주의 등 한국사회의 집단적 모순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대학 시절 나름 문학도를 자처했다면 한번쯤은 읽어 봤을 책이다.이후 최인훈은 회색인의 마지막 장면인 독고준이 이유정이 들어가는 장면을 이용하여 독고준이 다시 이유정이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찰나에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는 환상적인 일을 통해 등 오승훈의 서유기를 방불케하는 판타지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최인훈은 실천이성 바깥의 관념에 몰두하는 인간을 ‘회색인’이라 부르고, 그 회색인의 관념 여행을 ‘서유기’라 불렀는데 그가 창조한 독고준이란 인물은 좌와 우의 틈바구니에서 지식인의 고뇌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인물로 이후 수 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과 자아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인훈의 소설속 주인공인 독고준과 같은 동명의 소설이 나왔다.최인훈 작가가 쓴 작품인가 싶어 저자를 받더니 고종석이다.흠 동명의 다른 작품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웬걸 작가 최인훈이 미처 끝내지 못한 '독고준 3부작'의 완결판으로 '독고준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이면서 또한 독고준과 그의 딸 독고원의 관념과 생활을 그린 독립적 작품이라고 한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소설을 연작해서 쓰는 경우는 대게 몇가지 경우가 있는데 홍루몽의 경우처럼 원작자가 초고를 이미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타계할 경우 후대의 작가가 그 원고를 찾아 완성하는 경우,작가 타계후 작가의 원고 초안을 가족이 타 작가에게 완성을 하도록 하는 경우,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유능한 후배작가에게 쓰게해 후배작가의 성장을 돕는 경우등으로 나눌수 있다.

그런데 고종석은 고씨는 두 연작 장편 이후 3부작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상에 있는 최씨를 대신해 ‘독고준’ 3부작을 완성키로 하고 ‘서유기’ 이후 독고준의 삶을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그는 한국일보와의 인텨뷰에서 "최인훈 선생님은 당초 독고준을 주인공으로 한 3부작 소설을 계획했었다"며 "이번 소설이 <회색인> <서유기>를 이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활보다 사색이 승하다는 점, 주변적인 것을 옹호한다는 점에선 앞선 두 작품과 닮은 꼴"이라고 말했는데 작가가 원작자의 병상에 있다는 이유로 허락없이 이처럼 마음대로 글을 써서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병상에 있지만 최인훈이 이미 독고준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고,최인훈이 고종석에게 마지막을 부탁했다는 말도 없는 것 같은데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소설 독고준은 주류 문단과는 별개로 ‘관념소설’을 쓰며 ‘회색인’이라 불리면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소설가 독고준이 투신 자살을 하고 그의 일기를 화자인 그의 딸 독고원의 발견하고 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면서 일기에 그의 의견 혹은 단상들을 첨부하는 방법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다.
독고준은 참 독특한데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인문 교양서 같은 느낌을 준다.왜냐하면 이 소설은 독고준의 일기를 월별-혹은 주제별-로 나누고 한국 정치상황,가족,서양의 정치인, 지식인,감명 깊게 읽었던 책에 대한 생각등 독고 준의 생각을 일기 형식으로 적는데 그것을 본 딸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덫 붙이는 형식이다.
독고준이 소설이 아닌 교양서처럼 느껴지는 또다른 이유는 1950년대~2000년대의 세계사 사건과 인물에 대한 논평-예를 드골, 사르트르, 케네디, 닉슨, 김대중 및 한국 문단의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작가가 그동안 써온 신문 컬럼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고준은 20세기 후반의 전 세계의 정치와 문화와 예술의 분야에 대한 반세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한 지적 소양을 한번에 높일수 있겠지만 과연 독고준이 최인훈의 회색인과 서유기를 잇는 3부작의 대미를 잇는 작품일까 하는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왜냐하면 현대문학을 그것도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알 수 없는 작가에 대해서 거의 빠지지 않고 이런 저런 설명을 하는 것은 언어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물론 읽으면서 잘 쓴 책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을 소설로서가 아니라 인문 교양서적의 느낌이 보다 더 든다.

병상에 있는 최인훈이 이 책을 읽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작품이라고 칭찬할지 아니면 얼른 병세를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금 독고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쓰기 위해 펜을 들지 궁금해 진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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