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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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는 제레미 리프킨의 신작으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에 대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리미 러프킨의 작품은 엔트로피,노동의 종말,육식의 종말,소유의 종말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 공감의 시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보니 읽는데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솔직히 머리속에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전작인 <유러피언 드림>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고하며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했다면 공감의 시대 에서는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저자는 20세기가 석유라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경제 체제였지만 세계화가 정점에 이르러 기존의 경제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21세기는 다윈식 적자생존 대신에 공감이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지금 세계는 오픈소스와 협력이 이끄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공감의 시대 1부 첫 대목에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14년 12월24일 저녁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땅거미가 깔릴 무렵 독일군 병사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촛불을 붙이며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고 넋을 잃고 바라보던 영국군 병사들이 박수를 치다 캐럴을 부르며 화답하며 양 진영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나와 서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수천,수만의 병사가 그 뒤를 따랐는데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담배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추억을 교환했다.병사들은 다음날 아침 태양이 전장위로 솟아올랐을 때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르프킨은 이렇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 아니라 공감하는 동물이라고 강조하면서 공감하는 인간이 인류문명을 진화시켰으며 공감해야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즉 호모엠파티쿠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책 도입 서두에 르프킨은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라 공감하는 동물이라 주장에 대해 처음에는 선뜻 공감하기가 어려웠다.저자는 책속에서 많은 실 예와 이론을 곁들여서 인간의 본성에 공감적 특성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고 이런 공감의 능력이나 공감의 문명이 처음에는 가려져 있다가 지속적으로 발현되어 왔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고대 신화적 의식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발흥,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 및 19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와 20세기 심리학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인간의 공감이 어떻게 계발돼 왔는지에 대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과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불평등과 반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인류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잘되어 있을 경우 질투와 시기를 보내는대 노력(?)여하에 따라 타인의 것이 내것이 될수 있기에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발전해온 인류에게 공감의 씨앗이 있다는 좀 주장은 좀 우숩기도 하다.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공감의 시대’는 원제가 영어로 ‘empathic civilization’로 직역하면 “감정이입적 문명”이라는 뜻이다. ‘empathy’는 남의 아픔에 대해 동정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 정말 남의 아픔이 내 아픔 같은 감정이입 수준까지 가면서 같이 아픔을 느끼는 수준의 경지를 말하는데 과연 인류가 타인에게 그런 감정 이입 수준의 공감을 언제 가졌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몇 몇 뛰어난 사람만이 그런 경지를 가졌을 뿐이지 않는가!

저자는 책속에서 또다른 시각을 우리에게 던져주는데 바로 인류 역사의 발전이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의 양과 질(효율)이 늘어나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이 과정에서의 부산물로 ‘엔트로피’ 증가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인류가 기술적으로 진보할 때마다 공동체의 크기는 커졌지만 환경이 복잡해지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만큼 인류의 에너지 사용은 많아지고 자원은 더욱 빨리 고갈된다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무슨 말인가 하면 석유를 사용할 경우 에너지를 얻으면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데 비록 이산화탄소에 내재된 에너지 총량은 석유와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 가능한 상태(석유)에서 사용 불가능한 상태(이산화탄소)로 변환이 일어나면서 에너지는 고갈되어 간다는 것이다.
화석 에너지의 고갈과 그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재앙에 가까운 기후 변화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치솟는 엔트로피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21세기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게임에서 윈윈 전략으로, 폐쇄성에서 투명 경영으로, 이기적 경쟁에서 이타적 협업으로, 엘리트 에너지에서 재생 가능한 분산 에너지로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변하고 있으므로 인간 이해에 기초해 앞으로는 분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협업의 경제 체제에 동승한 개인, 기업, 나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8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을 도서관에서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읽고 그 내용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자의 말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모르지만 19세기 20세기에 걸쳐 이른바 서구 선진국들이 자행하던 제 3국가의 화석 자원 약탈을 통해서 발전했던 현재의 자본주의는 서서히 끝나가므로-즉 화석 자본도 고갈되고 총칼로 남을 약탈할 수도 없으므로-인류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전(全)지구적 경쟁을 심화시키는 현재의 문명에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앞당기자고 말 하는 것 같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의 키워드로 공감이란 말을 하고 있지만 서구 독자들의 입장에서 공감이란 말이 마음속에 와닿고 수긍이 갈지는 모르지만 솔족히 그들 눈에 변방의 한쪽끝에 있는 한국 독자의 시각으론 솔직히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내용이다.
책속에서 말하는 제 3차 산업혁명과 에너지 혁명을 위해 이른바 서구의 글로벌 기업들이 벌이는 활동은 또다른 의미의 제 3국가 수탈-과연 그들이 제 3국가에 공감을 가지고 많은 돈을 투자한 비즈니스 사업을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로 접근하는것일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공감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은 ‘이해’가 간다.또 그렇게 밖에 될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다자간 시대에 과거처럼 어느 일방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이란 키워드로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조금은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공감의 문명이 과연 엔트로피 증가라는 괴물과 충돌을 벌일 때 지구촌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에서 아직 저자도 확실히 자신하자 못한다는 감을 받게 된다.

800페이지에 어찌보면 그닥 재미없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읽어 볼 책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이 책을 읽고 미래학자의 주장에 대해서 얼마나 공감할지 여부는 책을 읽은 독자 각각의 몫일 것이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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