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원님이 인터넷 파워진에 쓰신 SF담론입니다.
http://powerpage.co.kr/powerzine/zine9805/story/story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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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SF담론- 얼굴없는 작가 이영수의 작품세계
제가 요즘 신세대 사이버 통신작가로 뜨고 있는 이영수의 과학소설 작품세계 전반을 다뤄본 평론입니다.
◈ 왜 하필 이 영수인가?
이 영수, 그녀는 90년대 중반 이후 거세게 불어닥친 PC통신망의 열풍이 낳은 사이버 문화계의 얼굴없는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이 영수의 캐릭터는 독특하다. 그녀의 통신망 ID 듀나는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그녀의 오빠를 비롯해 모두 3인이 공동으로 쓰는 ID라 하니, 이 영수 또는 듀나라는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인칭 대명사를 '그'라고 해야할지, '그녀'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 또는 그녀'라고 해야할지 헷갈린다.
이 말은 이 영수 또는 듀나라는 사이버 이름 속에는 세명의 다중 인격이 들어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은 이 영수의 관심사가 아주 다양한 하위문화 범주들에 걸쳐 있고 작품의 취향과 질이 약간씩 기복을 보인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영수라는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 다시 말해서 그들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일정한 수준에서 통일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필자는 그들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 영수에 대한 3인칭 주격 표기는 모두 '그녀'로 통일한다. 이것은 영어식 표현인 'he or she ~'가 우리 정서상 아무래도 낯설은데다가, '그녀'라는 인칭 대명사는 이 영수의 작품 성향에 대해 필자가 뒤에 논할 주제나 방향과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영수의 모든 글을 접해본 것도 아닐 뿐더러,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문화 게릴라'라고 지칭하듯 여러가지 다양한 문화적 관심사에 대한 평론, 시평(時評), 소설 등을 여기저기에 정기적으로, 또는 부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영수의 글을 체계적으로 검색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구나 필자가 그녀의 관심사와 100% 공감하는 것도 아닌 터에 굳이 그럴 필요성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 영수는 통신 공간에서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과학소설 작가일 뿐만 아니라 영화 주간지 [시네 21]과 인터넷 문화정보지 [펄프]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최근 그 동안 자신이 써온 SF단편들을 모은 단편집 <나비전쟁>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영수의 SF작품집을 선뜻 사기가 망설여지는 이라면 인터넷 하이텔 홈페이지에 있는 과학소설 동아리의 '창작과 번역'란에 올려논 그녀의 단편들을 먼저 읽어보고 판단하면 된다.)
여기서, 필자는 이 영수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유독 한가지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과학소설 창작물들이다. 이것은 SF가 비단 필자가 선호하는 분야란 점 때문만 아니라, 이 영수에게도 SF는 그녀의 문화적 주장과 세계관을 담는 출발점으로 기능하는 까닭이다. 요즘은 그녀가 꽤 유명세를 타서 이런 저런 매체에 SF에 국한되지 않은 이런 저런 글들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그녀의 기반은 SF에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녀의 과학소설 단편들을 다수 접해본 이들이라면 [시네21]이나 [펄프] 같은 지면에서 접하는 그녀의 문화 시평을 더욱 깊이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그녀의 SF에 주목하는 이유로 크게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그녀는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될 수 없으리만치 그 역사와 뿌리가 탄탄한 구미 과학소설에 대한 정보와 지적 소양이 풍부해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복거일과도 비견되는데,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복거일씨는 과학소설을 다변화하는 문화와 인간사의 제반 양상들을 포착해내는 문학의 한 하위범주로 받아들이는 반면 이 영수는 SF 자체에 푹 빠진 매니아적 기질을 마음껏 발산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복거일은 <파란 달 아래>나 <역사 속의 나그네> 같은 과학소설 뿐만 아니라 일반 주류문학 작품도 발표하지만, 이 영수는 골수 과학소설 작가처럼 보인다.
둘째로, 이 영수는 단순히 지식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완성도 이상의 수준높은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과학소설은 아이디어 문학이다. 뛰어난 문장력과 사회적 통찰력은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훌륭한 과학소설 작가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과학소설 작가는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재능 뿐만 아니라, 반드시 과학자 만큼은 아니더라도 과학 일반에 대한 수준 높은 교양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 지식을 독창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현란하게 늘어놓는다고 해서 과학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모 과학소설 작가는 "SF의 99%는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외국의 과학소설들을 보고 해외에는 모두 하인라인이나 아시모프, 클라아크 같은 작가들만 활동한다고 보면 곤란하다. 미국에서 SF의 모태는 싸구려 대중잡지에 실리던 펄프 픽션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영수의 작품들의 질을 평가할 때는 그 잣대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을 해외 거장들의 작품들과 맞비교해서는 아직 곤란하다. 하지만 적어도 문학성보다는 조회 수에 급급하고 오탈자가 빈번한 통신문학의 울타리 안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은 분명히 99%의 쓰레기 위에 올라선 보석이다. 문학적으로 세련되게 다음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은 재치가 있고 단편의 특성을 감안한 절묘한 반전이 돋보이며, 특히 (뒤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여성의 심리묘사에 탁월하다.
여기서 필자는 이 영수의 SF 작품관을 다루기 위한 텍스트들로 주로 인터넷과 PC통신망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창작물들을 참고했다. (그녀의 단편집 <나비전쟁>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거의 다 이미 통신란에 올라와 있는 작품들과 중복된다.) 통신망에 올라와 있는 이 영수의 창작물들 가운데에는 전형적인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기 보다는 환타지, 유머 꽁트, 세태풍자에 더 가까운 것들도 더러 있지만 넓게 보아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보아 함께 다루었다. (사변소설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필자의 글을 읽는 분들에게 먼저 말해둘 것은, 이 글은 엄밀히 말해 이 영수란 사이버 작가에 대한 객관적인 평론이라기보다는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의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영수의 신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정보의 유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고 한다.(나이는 작품들의 성향으로 보건대 이십대 중반에서 말 정도로 생각된다.) 최근 모 일간지에 그녀의 단편집 출간 기사가 꽤 크게 실렸어도 그녀와의 직접적인 인터뷰는 커녕 사진조차 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일단 얼굴없는 사이버 문화게릴라로 만족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필자가 그녀의 작품세계나 가치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통신망에 올려놓은 작품들에 근거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하지만 이 영수는 자신의 신상을 가리려할 지언정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은 거침없이 쏟아내길 주저하지 않는 전투적 성향을 보이는 전형적인 사이버 문학 작가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녀의 작품들만 다수 읽어도 그녀의 입장과 의견을 개략적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보았고 그런 시각에서 이 글을 서술해나갔다.
◈ 이 영수의 작품세계의 특색
1. 이 영수의 다채로운 관심사
이 영수가 눈길을 주는 곳은 정말 다채롭다. 구미의 과학소설, 세계각국의 동화, 신화, 전설, 동양의 고사, 만화, 영화, 나날이 변모하는 과학지식, 요리, 외계인, 흡혈귀, 고 미술품, 거시적 정치/경제/역사에서부터 자잘한 일상에 이르는 관심, 여성들의 지위개선 등등 세상의 이모저모에 관심을 안가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그녀의 취향은 컬트적이라 할 만큼 비주류 문화쪽으로 쏠린다.(가장 전형적인 예로 <불사파티>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 가운데에는 그녀의 상상력의 공장이 기존 과학소설들의 아이디어에서 원조를 받은 흔적이 보이는 것들도 간혹 있지만, 언제나 그 활용과 결론은 이 영수 고유의 것으로 귀착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잡다하고 박학한 지식을 동원해서 매우 독특한 소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선중조우>에서 그녀는 '은서 동물학(隱捿 動物學)'이란 가공의 학문을 선보인다. 이것은 네시나 설인, 빅 풋Big Foot, 인어처럼 세인에게 전설로만 전해져내려올 뿐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동물들을 찾아나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메시스>는 영화 <터미네이터2> 때문에 신선감이 덜하긴 하지만 인간행세하는 앤드로이드를 색출하는 또 다른 앤드로이드의 행태를 통해 커뮤니티 community의 해체를 암시한다. (자기 민족을 팔아먹는 반역자?) <필림프세스트>에서는 과거의 문화를 재현해서 돈벌이하는 직업이 나온다. 여기서 주인공은 루돌프 누레예프의 발레 '백조의 호수'처럼 과거의 유명한 각종 공연들이 담긴 2차원 영상기록들을 3차원 홀로그램으로 바꿔 공연하는 일로 먹고 산다. 이때 2차원 기록에서 부족한 부분은 책이나 다른 자료를 뒤져서 연출자의 상상력으로 메워야만 한다. <파도바의 비너스>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 뿐만 아니라 온도에 따라 수축 팽창하는가 하면 주변물질을 흡수하기도 하는 나무의 특성을 이용해 고 미술품의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는 미래의 미술품 감식가를 보여준다. <일곱개의 별>은 잡다한 외계 종족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을 설정해서 정치외교적인 풍자를 한 뛰어난 작품이다. 여기서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는 타 종족의 음식에 대한 각 외계종족들의 편견은 바로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화살이다. 일종의 SF판 '음식남녀'라 할까? (이 작품은 솔직히 외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독창적이다.)
한편 이 영수는 단순히 색다른 소재를 다루는데에 그치지 않고 SF 본연의 오래된 주제들을 자기식으로 변주하기도 한다. <렉스>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괴물이 인간을 해친다는 내용인데, 그 기본 뼈대는 오래된 고전 SF영화 <금단의 행성>의 플롯을 연상시킨다. <원칙주의자>는 아시모프가 설정한 로봇공학의 고전적인 3원칙에 대한 흥미로운 도전이다. (아시모프의 제1원칙은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이다.) 이 작품은 아시모프의 3원칙을 전제로 할 때 로봇이 과연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인가? 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과학소설에 로봇 장르를 보편화시킨 아이작 아시모프에 대한 일종의 애정어린 경의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도플갱어>는 타임머신이 과거로 갈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친살해 패러독스'를 약간 변형하여 시간여행자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자기살해 패러독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죽었는데도 미래의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데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은 시체를 백악기로 옮겨놓고 방치할 경우 각 시간대별 지구들 간의 질량보존의 법칙에 균열이 생긴다는 점에서 과학소설로서의 기반이 다소 취약해보인다. <그 크고 검은 눈>에 나오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행성이란 개념은 해외의 과학소설에서도 흔치 않은 소재다. 일본 작가 가노 이찌로가 지은 장편 <제7의 태양> 같은 작품이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데, 뭐니뭐니해도 그중 가장 유명한 걸작은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솔라리스Solaris;1961년>다. 이러한 개념은 크게 보면 지구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보는 '가이아'이론과 맞닿아 있는데,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Foundation>시리즈도 이러한 개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바 있다. 심지어 앨던 D. 포스터Alan D. Poster가 쓴 [Star Trek] 시리즈 "살아있는 구름"편이나 프레드 호일Fred Hoyle의 <검은 구름The Black Cloud; 1957년>은 단지 행성 뿐만 아니라 거대한 성운 자체가 지성을 가진 존재가 될 가능성까지 고려해본다. 이 영수가 개성을 부여한 이 생각하는 초거대 생물인 행성은 외계문명의 문물을 얻어오기 위해 자기 몸의 파편을 떼어내 우주로 퍼뜨린다. 이러한 덩어리들은 고등생명체들이 사는 행성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들의 노하우를 충분히 습득한 후 다시 모 행성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클라크의 단편 <십자군Crusade;1966년>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여기서도 외계에 지성이 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의 몸을 떼어내 우주 저편으로 보내는 행성이 나오는데 이 영수의 행성이 점액질인데 비해 클라크의 행성은 초전도성이 극대화된 결정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 <공 속에 스며든 손>은 밀실살인이란 추리소설의 고전적 소재를 다룸으로서 그녀도 아시모프처럼 추리기법을 SF와 접목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은 일부의 경우 공통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필자가 이 영수의 모든 창작물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라 일일이 분류하기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지구인들이 외계의 여러 고등종족들과 함께 우주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상부상조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이 눈에 뜨인다. 이 경우 지구인, 필로인, 페를레니인 등은 이러한 계열의 작품들에서 비중에 상관없이 교차 언급된다. (예: <숨은 태양>, <바벨의 함정>, <그 크고 검은 눈> 등) 이러한 공통 배경을 토대로 다양한 외전들을 지어내는 방식은 미국 SF에서도 그리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서 '공동창작 우주shared worlds'라고 해서 여러명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설정한 우주를 배경으로 저마다의 작품을 집필하기도 한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하고 싶은 바는 미국 SF계의 정황에 정통한 이 영수가 공통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집필한다는 사실이 하등 특이할 게 없다는 점이다.
2. 이 영수는 페미니스트?
이 영수가 지어내는 이야기들은 단순히 독특하고 다채롭다는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자신의 신상이나 프라이버시를 유난히 보호하려는 성향을 띠면서도 정작 작품 속에서는 매우 과감하고 적극적이며 냉소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따라서 개별 작품마다 기복이 다소 있긴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로 그녀의 깊은 곳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이다. 그렇다고 이 영수를 고전적인 스타일의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행동가의 이미지와 연결짓기는 어렵다. 그녀는 행동주의자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급진주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영수는 남녀의 불평등을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여자들은 이렇게 능력있고 우수한 존재라는 것을 담담히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녀의 작품들에는 여자들만 나오는 것은 있을지언정 남자들만 나오는 것은 전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SF라는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이 영수의 진짜 관심사는 여성 그 자체이다. 그녀는 여성이 외부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성은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장점은 무엇인가 같은 존재론적 물음에 집착한다. 아무리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SF라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낯선 장르를 다룬다해도 그녀에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은 여성에 대한 애정과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가 비교우위를 겨루면서 다투는 수준의 페미니즘보다는 아예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SF장르의 특성상 이러한 여성상은 지구 여성을 통해 보여지기도 하고 외계인 여성을 통해 보여지기도 한다. 여성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건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우주의 행복과 평화를 가져올 최종 조정자가 여성이라는 자신감이다. 탐욕에 눈 앞의 위기를 모르는 지구인 남자에게 납치된 외계인 여성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바벨의 함정>이나, 물 행성에 사는 여성 외계인을 통해 이상적이고 신격화된 여성상을 보여준 <로렐라이>,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의 운명을 가늠해보려는 페를레니인 여성과학자들의 노력을 담은 <숨은 태양> 등의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노라면 이 영수의 이같은 시각이 면면이 배어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영수의 작품에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대립항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전개의 주역을 맡으며, 남성이야말로 모든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는 복선 구실로 그치고 만다. <렉스>에서 의식이 만들어낸 괴물을 추적 수사하는 형사는 그래서 당연히 여성 경감이며 그녀의 수발을 드는 부하 형사 또한 여성이다. 남성들은 사태를 방관하며 안절부절하는 주변인물들로만 배치된다. 이처럼 여성들이 작품의 전개를 좌지우지하는 노골적인 성차별(?) 작품들로는 이밖에도 인어를 다룬 <선중조우>, 원본이 남성임에도 복제된 인간이 여성인 <비잔티움>, 두 여성의 대담 형식으로 되어 있는 <파도바의 비너스>, 세대간 갈등을 은유한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영수의 이같은 페미니스트 경향이 일부 작품에서는 소녀 만화나 하이틴 소설류의 느낌과 뒤섞이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과감한 생각의 전개를 주저하지 않는 그녀의 입장은 때로는 특정 성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차원을 넘어 동성애나 사회적 성(gender)의 장벽을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상황설정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때로는 암시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나타나는데, <불사파티>, <필름프세스트> 같은 작품들이 가장 대표적이다. 특히 <필림프세스트>는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성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바꿀 수 있는 과학만능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자아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고민한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처럼 단순히 육체만 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다 완벽한 성전이를 이루기 위해 과거의 기억까지도 선별해서 영원히 제거해버릴 수가 있게 된다면 성 정체성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가 몸만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것이 아니라 기억까지도 여자로서의 기억만 간직한다면 조물주도 이젠 명예퇴직해야할 판인가.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미래로 시점을 설정하고 있지만 동성애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잖게 거론되고 있고 실제로 아직 불완전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성전환 수술이 가능해진 현 세태에 대한 풍자로 읽힐 수 있다.
3. 가치전복에의 의지, 기성권위에 대한 조롱
페미니즘은 그 자체가 가치전복적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이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주므르고 그러한 현실을 여성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세뇌시키는 가부장제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수가 페미니즘에서 출발하여 기성 권위와 지배질서를 새삼스레 의심하고 의혹의 눈길로 돌아보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다. 기성 권위와 지배질서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인류 역사에서 늘 남성의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페미니즘과 가치전복적 사고는 그래서 한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단편 <구애>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을 통해 이 영수는 남성 편의 위주로 되어있는 결혼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여성은 남성의 구애나 청혼을 가슴졸이며 다소곳이 기다리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는 외계인 사회와 공존하는 지구 식민지를 무대로 하여 부모가 언제까지고 자식들을 자기식으로 살라고 강요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결국 새로운 행성에서 지구인의 자식들은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된다. 탐욕스런 지구인 정복자와 정신문화적으로 월등히 성숙한 외계 여성과의 갈등을 담은 <바벨의 함정>은 아서 펜의 영화 <작은 거인>을 연상시킨다. 후자에서 백인들은 탐욕스런 이기주의자들로 나오고 인디언들은 마치 도의 경지에 오른 선인들처럼 묘사된다. <바벨의 함정>에서 지구인 남성은 마치 유카탄 반도의 고등문명을 말살시킨 스페인의 코르테즈처럼 나온다. 이 영수는 종교에 대해서도 과감히 칼을 빼든다. 필자가 그녀의 여러 작품을 읽어본 바로는 그녀는 범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인 것 같다.(물론, 과학소설가라고 해서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다. 아시모프의 정반대쪽에는 C. S. 루이스 같은 독실한 유신론자도 있다.) <발정기>(출간된 책에서는 <오발행동>이란 제목으로 바뀌었음)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징후의 하나인 휴거 현상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종교의 맹목성이 일으킬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정해본다. 이 작품을 통해 이 영수는 만약 신이 있다고 해도 과연 인간이 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이 영수는 지식과 지혜를 갈망하면서도 그것들의 집인 학문에 대해서조차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가장 경제적인 해결책>은 생명과학의 발달로 학계원로들이 150세가 넘도록 장수하게 됨에 따라 학문이 정체되고 특정인의 독단과 전횡이 판치는 세상을 보여준다. 독단이 판치는 분야가 어디 학계 뿐이랴? 만약 정치적인 독재자가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아예 사전에서 '희망'이란 단어를 뜯어내야 할 것인가? 이 작품은 비록 근미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우리사회 곳곳에 만연되어있는 독단과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그레타에게서 내려온 복음>은 그레타란 수퍼 컴퓨터가 작성한 자료와 기본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사상을 만들어가는 미래의 철학자들을 보여준다. 자연과학의 비대화에 짓눌려 불안과 위기의식을 느끼는 인문학의 현주소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인류의 사상을 선도해가는 가장 기본적인 학문인 철학마저 컴퓨터에게 맡긴다면, 우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보다 나을 바 없는 처지가 아닌가!
4. 단편에 대한 애정과 관심
단편을 장편을 쓰기 위한 습작 정도로 여기는 편견이 아직 남아있는 현실에서 이 영수는 초단편에서 약간 긴 단편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작품들을 다량 발표했다. 이런저런 시도가 많이 가능하고 여유있게 작가의 메시지를 집어넣을 수 있는 장편에 비해, 단편의 생명은 번뜩이는 재치로 시작해서 놀라운 반전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과학소설은 아이디어 문학이라는 기본 성격 때문인지 주류 문학쪽보다도 단편 분야가 활성화되어 있다. SF의 황금시장인 미국에서는 매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편들이 발표되고 그것들을 시기별, 장르별, 주제나 소재별로 분류해 모은 선집들이 다양하게 출판된다.(그래서 미국에서는 작가 못지 않게 훌륭한 편집자가 주목받기도 한다.) 아울러 미국 SF계에서는 저명한 과학소설상을 단편과 중편 부문도 별도로 만들어 시상하고 있다. 어쩌면 과학소설이야말로 단편이란 문학형식에 가장 잘 맞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어본 이 영수의 작품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단편으로 분류할만한 길이다. 최근 출간한 책 또한 그간의 단편들을 모은 선집이다. 아직 젊은 작가로 추정되는 그녀가 언젠가는 장편도 쓰는 날이 오겠지만, 그렇더라도 늘 단편에 대한 애정을 버지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단편이야말로 작가의 번뜩이는 상상력과 재치가 돋보이는 문학형식이며, 더구나 그 장르가 SF일 경우 그 효과는 더욱 배가될 터이니 말이다.
◈ 맺음말 : 이 영수의 미덕
이 영수는 엄밀히 말하면 하드 SF작가는 아니다. 과학적인 논리와 기반의 치밀함은 작품의 개별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손치더라도 (예를 들어, 유머나 꽁트 스타일의 작품은 아무래도 리얼리티를 많이 벗어나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과학적인 논리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양자역학이나 물리학, 유전자공학에 관해 언급은 하지만 (클라크나 래리 니븐처럼) 그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작품과 접목시키지는 않는다. 나아가서, 그녀는 '미래의 과학'이란 전제 하에 듣도 보도 못한 학문이나 과학적 방법론을 상정해보길 좋아하며 때로는 환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런 구애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의식한 흔적이 역력하므로, 일단 넓은 의미의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즉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 쯤으로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사변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미국의 여류 SF작가 어슐러 르 귄을 들 수 있는데, 그녀는 "과학소설이라고 반드시 과학실험장이나 미래소설일 필요는 없다. 과학소설은 현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 될 수 있다." 며 과학소설의 사변소설로의 확장을 주장한 바 있다. 사변소설은 과학소설이 단지 과학적 아이디어의 실험장 안에만 갇여 있어서서는 안되며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서 출발한 과학소설 문학운동의 한 조류다. 이것은 원래 19세기말엽 유럽에서 인류와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사상과 철학이 문학형태로 발전한 초창기 과학소설들이 1920년대 이후 미국의 대중문학계에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대다수 과학소설이 질낮은 서부극이나 발명가의 모험담 같은 천편일률적인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품의 주제나 내용 측면에서 볼 때, 이 영수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기성 권위의 전복과 여성 주권적인 시각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두가지 관심사는 그 속성상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남성 위주의 고정관념을 비판하기보다는 아예 무시하고 새로운 대안으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 작품들을 많이 쓴다. 논쟁보다는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다소 담담한 태도다. 독특한 소재나 주제 아래 은근하게 표출되는 그녀의 진정한 관심사는 권력의 문제다. 그녀는 세상을 무리없이 조화롭게 이끌 적임자는 여성, 또는 여성처럼 포용력이 있는 넓은 마음의 사람이라고 본다. 아직 습작기의 작가인지라 완전히 그녀의 사상이나 세계관이 틀이 잡혔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자신의 작품들 간에 일관된 통일성을 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성 SF작가는 미국에서도 70년대 무렵 늦깍이로 출발했다. SF의 효시인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가 메리 쉘리라는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정말 르네상스가 오기까지의 기다림은 길고도 길었다. 하지만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남성작가들보다 급진적이고 진취적인 여류 작가들이 등단해 목소리를 높임으로서 미국의 페미니즘 과학소설들은 미국 내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SF 작가라 자천타천하는 사람들이 몇명 나왔지만 그중 주목받을 만한 여성 작가는 이 영수 혼자인 것같다. 필자의 이러한 예측이 억측으로 밝혀지는 날이 하루 속히 앞당겨져 많은 여성 작가들이 과학소설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해주길 바라지만,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앞서 있는 이 영수의 분발이 기대된다. 아직 척박한 한국 과학소설계에서 여성작가가 자신만의 색다른 작품세계를 마련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과학소설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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