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원님이 인터넷 파워진에 쓰신 SF담론입니다.
http://powerpage.co.kr/powerzine/zine9805/story/story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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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SF담론 –SF와 환타지의 차이
작년에 어느 스포츠 신문에서 한 중학생이집필한 훌륭한 SF소설이 책으로 출간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단 SF라면 제 눈이 한번은 더 가기 때문에 주의해 읽어보니 기사 헤드라인에는 SF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 기사를 읽어보니 내용은 전혀 SF와 상관이 없더군요. 출간 예정이라고만 되어 있어 제가 그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요약된 줄거리가 기사에 담겨있어 그 장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생이 썼다고 하는 작품은 과학소설과는 상관없는 환타지 소설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불투명한 현실과 전망을 보게 됩니다.
소위 사회에서 그럭저럭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신문기자의 인식마저 이 정도이고 보면 세간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면 SF라는 용어를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영화 장사꾼들의 작태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오해와 인식의 부족이 비교적 깨인 젊은 세대가자주 드나드는 PC 통신망에서도 만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여러 통신망에 과학소설 동아리가 있지만 그 회원들 가운데 여전히 과학소설과 환타지를 혼동하고 있는 분들을 왕왕 보게 됩니다.
특히 유니텔의 SF골짜기 란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아직 정식 동아리방으로 발족하기 못한 자유모임 형태라 관리자가 없는 탓일까요. 환타지 란에 들어가면 알맞을 글을 여기에 올려놓아 독자들과 또다른 작가들을 헷갈리게 하면서 과학소설의 정체성을 흐려놓는 되먹임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드라곤볼> 아류작을 써서 버젓이 SF라고 올려놓는 대담한 분도 계시더군요.) 이에 비하면 하이텔이나 천리안의 과학소설 동호회는 양반이죠. 이것은 시삽을 비롯한 운영진이 일정한 수준의 관리를 해온 덕분일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과학소설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 나서 기준을 명확히 해주지 않으면 대다수가 어리둥절해하는 개념의 문학이라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과학소설과 환타지의 장르 개념을 나름대로 구분지어 과학소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시는 분들의 머리를 맑게 해드리려 합니다.
그럼 환타지와 과학소설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과학소설이 뭔지 다시 한번 짧게 요약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뭐가 다른지 비교의 준거점이 마련될테니까요. 과학소설의 정의는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고 사회나 문화마다 가미하는 요소가 조금씩 다를 지 모르지만 그 기본형은 다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과학소설은 아이디어 문학이다.
SF를 일본식으로 번역할 때는 공상과학소설이라 합니다. 최근 과학소설이라 명칭을 바꾸고자 하는, SF를 사랑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 용어에 반감을 갖기도 합니다. 소위 공상이란 단어가 작품과 장르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죠. 하지만 공상과학소설이란 말이 꼭 틀린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SF는 확인되고 검증된 과학지식과 논리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약시켜 또다른 비전을 실험하는 문학이니까요.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지식을 이용해 일반사람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문학이 SF라는 점입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추리 소설이나 공포소설 또는 SF소설은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가져야만 특화된 문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지금 생각하면 고난이도에 속하는 과학기술과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미래사회가 되면 과학소설과 일반소설과의 영역구분이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므로 SF는 여전히 고유의 색채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일반문학은 인간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창구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과학소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에서 아이디어가 좀더 유별나고 실생활에 익숙치 않은 방식으로 풀어간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과학지식이 너무 과잉된 나머지 일반독자들을 질식시켜버려서는 과학소설이란 문학장르가 설데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는 과학지식보다는 그 주어진 사실을 갖고 얼만큼 어떻게 논리적인 (그럴듯한) 비약을 하여 뜻밖의 결론을 유도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를 봅시다. 로봇이 살해한 것으로 의심이 가는 살인사건을 두형사가 담당하게 되는데 한쪽은 물론 인간이고 다른 파트너는 로봇입니다. 하지만 이 로봇은 이루말할 수 없이 정교해서 인간은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독자는 양자의 희안한 파트너쉽을 따라가면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폴 앤더슨의 <타우제로>나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처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용한 시간팽창효과를 아이디어의 모티브로 삼는 경우에도 작가들은 그 이론의 딱딱한 설명에 함몰되지 않고 그점을 이용해 원거리 원정을 통한 식민지 개척이라든지 빅뱅 이후에도 살아남아 2세대 우주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심지어 베트남전을 SF식으로 패로디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원한 전쟁>은 시간팽창효과 탓에 수백 수천년의 세월 동안 거듭해온 전쟁이 일종의 사기극에서 비롯되었다는 반전주의적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과학소설은 어디까지나 과학이 가미된 것이지 그 본질은 픽션, 즉 문학입니다. 해당 소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비전을 제시해주고 인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면(<멋진 신세계>나 <지구 유년기 끝날 때> 같은 작품들처럼) 더 말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문학의 유희적 기능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과학소설의 기반은 (최소한의) 과학지식이다.
앞서 말한 부분과 중복되는 면이 많으므로 (왜냐하면 SF에서 아이디어와 과학지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과학소설은 어디까지나 문학인지라 공포기법을 도입할 수도 있고 (SF로 분류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의 일부 작품들이나, 조지 R.마틴의 <샌드킹>처럼), 추리기법을 끌어들일 수도 있으며(<강철도시>처럼) 서정적인 러브스토리(페미니스트 작가인 코니 윌리스의 일부 러브스토리 작품들처럼)가 가미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스타일로 요리하건 간에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의 기반이 과학지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부연하건대, 과학소설이라면 과학지식의 전시장이 되거나 거기에서 허우적대라는 말이 아니라 전체 소설에서 분량을 얼만큼 차지하건 간에 상관없이 과학적인 기반이 작품의 본질을 좌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소설에서 과학이 빠진다면 앙꼬없는 찐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주선이 나올 경우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빛의 속도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넘어서려면 초광속 우주선이란 개념을 단어만 나열할 것이 아니라 그 로켓연료의 재료가 유별나다든가 (애프레모프의 <안드로메다 성운>) 로켓추진 방식이 독특하다든가 (램제트) 하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최소한의 논리적인 설득을 해야만 합니다. 아직 과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주장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면 그 작품도 과학소설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얼만큼 넘나드냐에 따라 환타지냐 과학소설이냐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두가지 요소는 질의 고하를 막록하고 과학소설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입니다. 그 밖에 사회적으로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자질(문체와 문장력)까지 갖춰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죠.
3. 환타지 문학에 대해
저는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환타지 문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장르의 글을 깍아내리거나 깔보려는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환타지 문학은 멀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부터 현대의 <반지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전통이 있는 문학의 한 하위장르입니다. 환타지는 흔히 신화의 세계에서 많은 영감을 가져오는데, 이를 감안하면 환타지 문학의 뿌리는 그리스, 로마 문학이나 성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다만 제 개인적인 취향일 뿐입니다. (누구나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하긴 힘든 법이니까요.)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과학소설과 환타지 소설에 대한 용어와 개념 구분을 확실히 해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환타지에다가 레이저 검이나 광선총 몇개 집어넣어 놓고는 과학소설입네...하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영화 <스타워즈>와 그것을 소설화한 연작은 엄밀히 말해 과학소설이라고 볼 수 없고 서부극을 우주로 무대만 옮긴 환타지라고 규정해야 제격입니다.
그렇다면 환타지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아무런 현실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인간사를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문학 형식입니다. 요정이나 괴수, 신령, 귀신, 난장이, 도깨비... 뭐든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또 세상에 대한 설정도 작가 마음대로라서 지구와는 전혀 다르거나 일부만 변형시킨 세계를 얼마든지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흑마술, 백마술은 물론이요, 실제 세계에서 불가능한 어떤 일을 벌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는 환타지를 그 껍질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환타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기하고 기이한 것들을 얼마나 늘어놓느냐가 아니라 겉으로 보아 낯설어 보이는 세상의 이야기지만 그것이 현실세계에 살고 우리 독자들에게 강렬한 공감을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니벨룽겐의 반지>에는 인류사 이전의 거인들과 난장이들, 초인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권력욕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조롱입니다. 지상의 권력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보다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 이야기는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괴물들을 창조해냈을 뿐입니다.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연작에서는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마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또다른 자아에게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극복했을 때 비로소 그는 원래의 마법을 되찾게 됩니다. 이것은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법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의 매개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주인공의 거듭되는 재난과 좌절, 그리고 극복에 감정이입하면서 같이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서점가나 통신망에서 자주 보게되는 환타지 문학 작품들을 보면 한가지 우려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기괴하고 낯선 소재와 분위기, 또는 스타일만 남고 작품의 주제는 그야말로 썰렁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는 작품들이 적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것은 과학지식만 나열하면 과학소설이 된다는 발상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환타지 문학을 문학으로 대우해줄 수 있는 이유는 그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그 스타일에 배어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 우려되는 현상은 환타지 스타일에다 의사과학적인 용어를 한두개 넣어 'SF환타지'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칭을 내거는 작품들이 늘고 있는 현실입니다.
특히 통신망에 올리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심합니다. 필자의 바램은 의사과학적인 용어를 환타지에 도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경우에 SF라는 장르명칭을 함부로 갖다 붙이지 말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요정들이 레이저 건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그 작품이 SF가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동양인이 서구적인 화장을 한다고 해서 서양인으로 보아줄리 없듯이 말입니다.
물론 작품에 따라 환타지인지 과학소설인지 그 경계가 불확실한 경우도 있습니다. 로저 젤러즈니나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는 이 양쪽 장르를 마음대로 넘나들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과학소설이라도 신비적인 색채가 묻어 있고 환타지라도 현실감이 있어 보입니다. 하긴 장르를 넘나드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나 의지만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으니까요. 커트 보네것 같은 미국작가는 과학소설 작가로 출발해 일반 주류소설까지 쓰게 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해진 <시계태엽 오렌지>를 쓴 작가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혼혈인 때문에 동양인과 서양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학소설은 과학소설 나름대로의 중심이 있고 환타지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똑바로 서 있을 때 비로소 양자를 넘나들며 함께 버무린 작품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직 한국처럼 이 두 장르의 문학이 각각의 존립 기반마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현실에서, 그 경계를 뒤흔들어서는 궁극적으로 환타지 장르와 과학소설 장르 둘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성장을 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각 장르가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그 양자를 크로스오버하는 작품들이 일부 나오는 정도가 가장 이상적일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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