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고장원'님 글입니다.
http://www.pyroshot.pe.kr/sf/arc/981220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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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과 현실
지은이: 고장원
작성일: 98년 12월 5일
과학소설하면 흔히 *허무맹랑*이란 단어와 혼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꿈으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을 "SF같은" 또는 "SF에서나 가능한" 따위의 형용사구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과학소설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러한 세태에 발끈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과학소설 가운데에는 머지 않은 미래에 가능한 과학적 전망을 담은 것이 있는가 하면 이론상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도저히 실현되기는 어려워보이는 생각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작품들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외계에서 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종의 공포로 몰아간다는 류의 소설과 영화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의 먼지, 유성, 혜성의 파편들이 지구궤도에 밀려들고 있음을 생각해보세요.) 만약 "외계에서 온"이라는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있다면, 그 설정을 유전공학 실험 중에 뜻하지 않게 탄생한 변종 바이러스라고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또 <신의 망치> 같은 소설이나 <딥임팩트>, <아마겟돈> 같은 영화들의 기본설정처럼 지구궤도에 소행성이나 혜성이 뛰어들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죠. 과거의 예를 보더라도 과학소설은 일찌기 비행기나 잠수함, 탱크 따위를 예견했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소설은 좀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인류의 미래와 위상을 다뤄보고자 하기 때문에 현대의 독자가 현실감을 느끼기에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나 <파괴된 사나이>를 보면 이것은 하나의 염원을 담은 것이지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고 보기는 곤란하거든요. 심지어 로저 젤러즈니의 <빛의 왕>이나 <내 이름은 콘라드> 같은 작품에 이르면 과학소설과 환상소설의 경계까지 헷갈리게 되구요.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은 어슐러 르 귄의 말마따나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오늘날의 과학은 과학소설이 예견한 전망 가운데 상당수를 실현시킴으로서 과학소설과 현실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놓고 있지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미국 토머스 제퍼슨 대학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흰 쥐를 *유전자 수리*를 통해 검은 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윤경근이란 이름의 이 과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쥐의 몸 전체가 흰색이 된 것은 피부 색깔을 변화시키는 색소인자인 멜러닌 생산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에 결함이 생겼기 때문인데, 이 유전자 변이를 고쳐주면 다시 멜라닌이 만들어져 흰 쥐는 검은 쥐로 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는 "변이된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고치는 기술은 좀더 보완되면 각종 유전질환을 치료하는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얼핏보면 과학기술의 이러한 발전은 인류에게 좋은 영향만 미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얼마든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왜곡될 수 있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단순히 전쟁무기의 발달(이 경우에는 생화학무기)만 부추길 뿐이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의 도덕율에까지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일찌기 과학소설은 생명공학이 일으킬 수 있는 도덕율 문제까지 간파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특정 작품의 인용보다는 스타니슬라브 렘이 쓴 에세이의 일부를 인용해보기로 하죠. (스타니슬라브 렘은 의사 출신의 과학소설 작가로 다음 내용은 그의 평론집 <미시세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만약 존이란 사나이가 삼백년 전에 이미 죽었지만 그의 생식세포가 냉동보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세포들을 통해 수태한 여인은 피터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래도 존은 피터의 아버지가 될까? 그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 이런 가정은 어떨까? 존이 죽으면서 생식세포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한 여인이 유전공학자에게 의뢰하여 존의 표피에서 추출해낸 세포 하나로 연구소에서 존의 정충을 합성해냈다. (신체의 모든 세포들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다.) 만약 수태가 된다면 존은 이 경우에도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지금에라도 피터의 아버지가 되는 걸까?
아예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떨까? 존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체세포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존은 그의 자식의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단계들을 밟도록 유전공학자에게 유지를 남겨놓았다. 단, 이 경우 그녀가 낳은 아이는 누가 보더라도 존을 닮아야 한다. 게다가 유전공학자는 어떤 정충도 사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그 여성의 난자를 가지고 처녀생식(또는 단성 생식)을 일으켜야 한다. 이에 따라 그는 유전자를 조율해서 피터가 존을 쏙 빼닮게 태어나도록 그 유전자를 발생학적인 단계에서부터 관리해야 한다. (이 때 존의 사진이나 생전에 녹음해논 존의 목소리를 참고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유전학자는 존이 태어날 아이에게서 기대하는 모든 특징들을 자원한 여인의 염색체 속에 '조각해넣어야' 한다. 그렇다면 "존은 피터의 아버지인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맞다" 또는 "아니다" 식으로 명쾌하게 답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존은 사실상 아버지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경험론에만 호소해서는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정의는 본질적으로 유전공학자 뿐만 아니라 존, 피터의 어머니 그리고 피터 모두가 살아있는 사회의 문화적 기준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
그러한 기준이 확립되어 존의 유언 지침대로 엄격히 준수해 태어난 아이가 그의 아이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만약 그 유전공학자가 스스로 또는 다른 누군가가 부추기는 바람에, 그 아이의 유전형질의 45%를 유언한 대로 하지 않고 전혀 다르게 구성했다면, 해당 문화권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존을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몇몇 전문가들이 램브란트의 작품이라 추정되는 그림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경우와 같다. "이건 램브란트의 그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이는 "이건 램브란트 작품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논란은 비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는 램브란트지만 다른 익명의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시켰다면 얼마든지 빚어질 수 있으므로, 이 그림의 45%는 램브란트의 손길이 닿은 것이고 나머지 55%는 다른 사람이 손본 것이라고 판정내려질 수 있다. 이처럼 부분적인 저작권의 경우에는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단지 부분적으로만 아버지가 되는 것이 가능한 상황들이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상황들은 또한 다른 방법들을 동원해서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존의 정충에서 추출한 유전인자들 중 일정량을 제거한 뒤 그로 인해 부족한 만큼만 아예 다른 사람의 유전인자로 채워넣을 수도 있다.)
"존은 피터의 아버지다, 또는 존은 피터의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역설이 가능하게 할 유전자 조작은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를 묘사한 작품이 오늘날에는 환타지지만, 삼사십년 뒤면 정말로 실감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 간의 인위적으로 가공된 이 같은 혈족관계는 그 때가서는 지금과 같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부자관계는 유전공학이 실현되는 시대와는 다를 것이다.
--- 자료원: 스타니슬라브 렘의 <미시세계:과학소설과 환타지에 관한 글쓰기>, Stanislaw Lem/ Microworlds: Writings on Science Fiction and Fantasy, ed. by Franz Rottensteiner, Harcourt Brace & Company, Orlando, Florida
위의 글을 읽어보면 스타니슬라브 렘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예언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의 글을 쓴 뒤로 불과 삼사십년 뒤면 자신의 가정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칠십년대 초반에 바라본 스타니슬라브 렘의 전망은 98년도 시점에서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십년대에 태어나는 우리의 아들 딸들이 어른이 될 때 쯤에는 그들이 (스타니슬라브 렘의 예견대로) 결혼하지 않고 단지 처녀생식만으로 자식을 얻을 수 있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사회의 가족에 대한 가치관과 도덕은 어떻게 변모할까요?
위에서와 같이 생명공학이 발달하고 그것을 더 이상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가 오면 이러한 소재를 다루었던 과학소설들은 더 이상 *과학*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어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류문학 작가들이 똑같은 문제를 파고 들며 인간학적인 고민을 하겠죠. 이 경우 그들은 전혀 자신들이 과학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학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되는 걸까요?
윤형근 박사의 연구 결과는 조만간 고장난 유전자 때문에 각종 기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완치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하게 합니다. 어쩌면 "선천적 기형"이란 단어 자체가 의학사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떤 기술이든지 극도로 발달한 것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술이나 그 모태가 된 과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이중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한편에는 테레사 수녀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히틀러 같은 이가 공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앞에서 예로 든 유전자 기술은 이로운 목적에 쓰일 수도 있지만 거꾸로 멀쩡한 인간을 기형으로 만들거나 특정 민족을 도태시키는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 같은 이가 첨단 생명공학을 자랑하는 국가의 정치 지도자로 등장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문자 그대로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한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첨단 생명공학이 체제 유지를 위한 장치로 봉사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저는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과학소설의 설 자리가 있는 것이고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소설은 리얼리즘 소설은 분명 아닙니다. 과학소설이 예견한 미래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바가 다 들어맞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통찰력있는 소설가라도 점을 치듯 작품을 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소설은 현실감을 줍니다. 일종의 대체 현실에서 독자가 과학이 인간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기만 한다면, 외계인이 나오든 낯선 첨단 과학기술이 응용되든 그 과학소설은 현실감을 지닌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우수한 과학소설은 과학을 편드는 하면 그 부작용을 우려하기도 하면서 인간에게 과학에 끌려다니지 말고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끊임없이 충고해왔습니다. 이것은 과학소설이 과학을 단순히 알기 쉽게 풀어쓴 교양 에세이가 아니라 과학 없이는 살 수 없게된 인간 사회에 대한 인간학적 성찰을 담은 문학인 까닭입니다.
하루 하루 변하면서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과학이란 열차에 타고 있는 인간을 순간포착해서 카메라로 찍은 다음 인간학적인 해석을 덧붙여 놓은 해설판이 바로 과학소설입니다. 그래서 과학소설은 꿈인 동시에 현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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