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런 감독의 오디세이는 세계적인 대 흥행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서양의 대명사인 고전적 의미의 백인 미녀인 헬레나를 흑인으로 대체함으로써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 있습니다.

하지만 놀런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과 헬레나 역을 맡은 루피타 뇽오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흑인 헬레나의 논란을 돌파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오딧세이에서 흑인 헬레나가 등장하는 분량이 약 7분 30초 정도여서 카메오 수준의 조연정도의 역활이었기에 관객들의 몰입감을 저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트로이 전쟁의 원흉(?)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경우 고전 그리스 문학에서도 그 비중이 매우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트로이의 헬레나를 접할 수 있는 책은 대략 3권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근간이 되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헬레네는 전체 15권 중 단 1%도 되지 않는 초미니 카메오 수준입니다.트로이 전쟁을 다루기 시작하는 제12권에서 파리스가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인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쳤고, 이를 추격하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이 집결했다고 짧게 한줄로 서술되어 있고 15권에서는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헬레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늙고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왜 젊은 시절 두 번이나 사내들에게 납치당해(테세우스와 파리스) 이 난리를 겪었단 말인가"라며 한탄하는 장면에서만 나옵니다.


2.일리어드

그리스 신화의 핵심 고전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d)》 원전 전체에서 '파리스의 심판' 에피소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24권 중 약 3~4개 권에만 직접 등장하는 조연 수준입니다.

총 15,600여 행에 달하는 거대한 서사시 대부분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영웅들의 치열한 전투에 집중되어 있으나 헬레네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전쟁의 명분이자 비극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학적 핵심 장치로 기능합니다.

제 3권에서 헬레네는  트로이 성벽 위에서 시아버지 프리아모스 왕과 함께 그리스 연합군 영웅들(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등)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이름과 성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 일리어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6권에서 전쟁터로 나가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나약한 파리스 대신 전사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헥토르를 존경하고 위로하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24권에서는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트로이 여인들을 대표하여 애가(哀歌)를 부르는 세 여성(안드로마케, 헤카베, 헬레네)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트로이에서 모두가 나를 원망하고 손가락질할 때, 오직 헥토르 오라버니만은 단 한 번도 내게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고 오열며 고백합니다


3.오디세이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의 원전인호레로스의 오디세이에서도 역시나 헬레나가 나오는 비중은 전체 24권 중 딱 2개 권(제4권, 제15권)에만 등장하는 카메오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은 트로이 전쟁 이후 영웅들의 비참한 근황과 전쟁의 허무함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디세이 24권중 헬레나가 등장하는 부분은 단 2회로 분량이 매우 짧은 편입니다.

제4권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스파르타를 방문했을 때, 남편 메넬라오스 왕과 함께 늙어가는 왕비로 처음 등장합니다.

제15권에서 텔레마코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헬레네가 직접 짠 아름다운 옷을 선물하며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에 짧게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 독수리가 거위를 채 가는 모습을 보고, 헬레네는 "오디세우스가 곧 고향으로 돌아와 구혼자들에게 피의 보수를 내릴 것"이라는 날카로운 예언을 내놓으며 영웅의 귀환을 암시합니다.


4.아이네이스

아이네이스는 베르길리우스가 기원전 28년부터 11년간 매달린 로마 건국 서사시로 그리스군에 패하여 멸망한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신의 뜻을 받고 부하들과 함께 방랑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라티움 땅에 로마 제국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로마의 건국 서사시인 이 책에서 헬레네는 트로이가 멸망하던 밤, 제2권에서 분노한 주인공 에네이아스가 "저 만악의 근원을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겨눌 때 제단 뒤에 숨어 떨고 있는 비참한 모습으로 딱 한 번 짧게 등장합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서 헬레네는 매우 적은 분량으로 나옴을 알 수 있지만 그 비중으 "서양 역사와 신화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절대적인 트리거(도화선)"로 그녀의 존재 자체가 신들의 계획을 완성하고 영웅 시대를 종말론적으로 끝맺는 핵심 기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헬레네는 고전 문학 속에서 "분량(Quantity)은 적지만, 존재감(Quality)은 압도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영웅들의 칼날 앞에서는 숨어있는 조연(거의 카메오 수준)이었지만, 인간의 욕망과 비극을 다루는 무대 위에서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책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습니다.

by caspi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6-08-20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개봉한 신작 영화가 화제라서 그런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관련 책들이 많이 소개되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의 책이지만, 여전히 고전으로 많이 읽는 책이라서 그런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도 있는 것 같고요. 카스피님, 더운 날씨 건강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김민표 2026-08-21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천년전의 통찰은 항상 귀감이 되고 함정을 피해가는 힌트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오디세이도 정말 재밌게 봤는데,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