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독살사건 -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7월
구판절판


인종의 아버지 중종(재위: 1506~1544년)은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중종은 성종(재위: 1469~1494년)의 둘째 아들이었고, 성종의 맏아들은 폐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재위: 1494~1506년)은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임금이었다. 탁월한 시인이었던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다. 그는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기생들의 유원지로 삼음으로써, 조선에서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던 공자마저 무시했다. 성균관에 모셨던 공자 이하 모든 선현의 위패는 고산암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음악을 맡아보는 관청인 장악원에 방치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공자의 위패를 방치하고 제사까지 폐지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의 지배 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립 관료 양성소인 태학의 선비들을 쫓아내고 무당을 불러모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연산군이 자신의 쾌락과 유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리학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했다면 그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존의 이념과 가치 체계를 우습게 여겼을 뿐,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 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연산군이 성균관과 태학을 폐하자 사대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선은 임금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전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사대부들은 1506년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린 이 사건은, 중종의 이름을 따 '중종반정'이라고 불렸지만 정작 중종은 반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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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당일 반정군이 사저를 에워싸자 진성대군(중종)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오해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 신씨愼氏의 만류로 하인을 시켜 집 주변을 살펴보니 말머리가 집 밖으로 향해 있어, 자신을 죽이려는 군사가 아님을 알고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가 자신을 죽이려는 연산군의 군사인지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반정군인지도 몰랐던 진성대군이 반정 초에 힘을 가질 수 없었음은 분명했다.-.쪽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들은 이 예송 논쟁을 당파 싸움 망국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해 우리의 민족성을 비판했다.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형식적인 문제로 논란을 일삼았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형식적인 문제만도 아니었고, 실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송 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가'라는 지극히 민감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장장 15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왕위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으니, 이는 일본으로 따지면 일왕 다이쇼(大正)가 메이지(明治)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쟁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어찌 형식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송 논쟁이 격화된 데에는 조선 후기 들어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예학禮學으로 수구화한 사상사적 배경도 한몫했다. 조선 중기까지는 동인의 정치 이념인 이기이원론과 서인의 이념인 이기일원론의 대립에서 보여지듯이 사상의 흐름이 사회의 발전 방향과 보조를 같이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분제 해체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 강해지자, 신분 질서를 강화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층의 의지가 예학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불교 이념을 극복하고 조선을 개창한 조선 성리학 사상의 자기 부정이기도 했다.-.쪽

왕조의 존속 기간이 중요한 것은, 왕조나 국가의 생명 사이클이 비슷한 경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을 지닌다. 사이클의 각 과정은 상황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왕조나 국가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 멸망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였다. 이런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일본이 침략했을 때 지배층들이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 조선 지배 체제는 붕괴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국왕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을 질렸다. 이는 '사대부→일반 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선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강계에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그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행위로 당장 물고를 낼 죄였지만 선조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들이 다스리는 조선의 국가 통치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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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초에 조선은 사대부,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의 국가였다. 물론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이름만 걸어놓았으나 어쨌든 법제상으로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개국 후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때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무려 300년이란 세월을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이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선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였는데, '국왕 독살설'도 그 하나다. 국왕 독살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왕 독살설은 왕조 국가의 대표적인 비정상적 정치 행태국왕 독살설은 왕조 국가의 대표적인 비정상적 정치 행태다. 다시 말하면 이미 생명력이 다한 왕조 국가가 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왕 독살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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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ㆍ중국ㆍ일본 국왕의 권한 차이
조선ㆍ중국의 임금과 일본의 장군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가 달랐다.
실질적인 일본 국왕인 막부 장군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 영지의 여탈권與奪權을 장악했다. 장군은 심지어 다이묘들에게 할복을 명할 수도 있었다. 할복을 거부하면 군사를 일으켜 더욱 가혹하게 보복했다. 그러나 이는 장군에게 힘이 있을 경우였다. 전국을 장악한 도요토미가 불과 13년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에게 망해 버렸듯이 장군의 힘이 약화되는 순간 반란은 싹텄고, 그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면 그 막부는 망했다.
중국의 황제권은 여타 국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 평민 출신으로 명조를 개창한 주원장은 중서성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중서성의 승상이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키고, 대도독부를 5군도독부로 고쳤으며, 어사대를 도찰원으로 고쳐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신하들이 권력을 두고 황제와 다툰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신들보다는 주로 환관들의 전횡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보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던 환관들이 힘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왕조 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았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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