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이후 아침마다 눈을 뜨면 제일 처음 떠올랐던 생각은 이제부터의 세상이 이제껏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처럼 모든 것이 혼돈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를 만난 이후 확실해진 것도 있다. 그건 내가 다시는 스스로 이 지상을 떠날 결심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 그것이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고 형벌이었다. 헤드라이트 빛 속에서만 내리는 이 겨울비처럼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도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내 어둠 속을 헤치고 죽음처럼 숨쉬고 있던 그 어둠의 정체를 찾아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들, 지독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실은 너무 눈부신 빛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게 어둠이 아니라 너무도 밝은 빛이어서 멀어버린 것은 오히려 내 눈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내가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으리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신의 영광을 이미 나누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로 인해 깨달았으니까. 그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을 내게 주신 신께 아직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쪽
"그래 시간이 지나면 늙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죽지... 서두리지 않아도 언젠가 우린 모두..죽어.."-.쪽
"근데요, 저기…… 왜 어떤 사람들은 옥색 옷을 입고 어떤 사람들은 푸른색 옷을 입고 그래요? ……저 푸른색 옷은 추워 보이는데." 나는 말을 돌렸다. "옥색 옷은 자기가 사서 입는 거고, 푸른 옷은 국가가 지급하는 거고…… 그렇죠." "추운데 왜 옷을 사서 입지 않나요? 저 옥색 옷이 비싼가보죠?" 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내가 다시 물었다. "이만 원이요."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문득 이주임이라는 교도관이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사천 명 있는데…… 저희가 가끔 컴퓨터를 쳐보면 육 개월 동안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이 오백 명쯤 돼요." 걸음을 멈추고 내가 이주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죠. 생계형 범죄자들인데…… 그런 경우 가족이 없다고 봐야죠. 아니면 외면하거나." "오백 명…… 영치금이 한 푼도 없다구요?" "육 개월 동안 영치금이 천 원 미만인 사람도 또 그쯤 돼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돈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 들어오겠어요?" 난데없이 며칠 전 백화점 매장에서 사온 술값이 생각났다. 정말이에요? 묻고 싶었는데,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파리의 광장은 해마다 늘어난 한국인 관광객으로 꽉 차버려서 여름만 되면 우리 유학생들은 한국 사람들 오지 않는 시골로 떠나야 한다고 농담들을 했었는데…… 한국 사람들, 파리에 오면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외에는 아예 묵으려고도 하지 않아서, 사실 나는 우리 나라가 아주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영치금 천 원 미만인 사람이 오백 명…… 육 개월 동안이나…… 그럼 휴지랑 내복이랑 그런 것을 다 어떻게 조달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모를 따라가는 내 걸음이 바닥에 닿는 것 같지 않았다.-.쪽
"전에 당신이 편지에다 그랬잖아요. 이게 마지막 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봄날에 지당도사들이 하는, 당연하고 지당한 이야기 같은 거 하지 않고 싶어요. 시간이 없잖아요. 나는 이왕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거, 당신하고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일 년에 봄이라는 계절이 한 번뿐이라는 거 당신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이 봄을 다시 보기 위해 일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처음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자 당신이 말한 대로 이 봄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 봄처럼 내게도 느껴졌다는 거예요. 한 계절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그렇게 늘 오는 계절이, 혹여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하루하루가 목이 타는 것처럼 애타게 지나간다는 거…… 나무에 물이 오르는 그 찰나도, 진노랑꽃 무더기로 피어서 흔해빠진 그 개나리에게도,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처음 대면하는 기분이고 또 대면하자마자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 그래서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물들이 널려 있는 게 아니라, 가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혀올지도 모른다는 거…… 그거 당신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는데, 그게 나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쪽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이 세상에서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행복한데 왜 나만 불행할까 하는 게 날 더 불행하게 만들었지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은, 어리둥절하게 되었어요. 나도 불행한데 내가 왜 이곳에 갇혀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여기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집합소 같아요. 이렇게 많은 사람 하나하나에마다 그렇게 많은 죄라는 게 있을 수 있다는게 놀라웠고, 그 죄 뒤에도 그 수많큼 많은 그렇게 죄를 지어 불행한 이들이 여기로 들어온다는 게 또 놀라웠어요. 나는 그걸 알고 싶었어요. 나는 왜 밖에 있고, 당신은 왜 여기 있는지, 그래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왜 불행한지, 내가 왜 행복할 수 없었는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나요?
"저기요.. 그 집행이요... 미리 통고가 오나요?" 이주임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 전날 저녁에요.. 그리고 나면 우리 교도관들 술 안 먹고는 못 배겨요. 죄인들인데... 그 사이 밉다 밉다, 하면서 정들어 버렸고, 신문에서 보았을 때는 짐승이었는데 알고 보면 인간인 거고, 인간은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 비슷한 거고... 그리고 집행 있고 나면 또 한달쯤 술 없이 못 살게 되죠. 그런 말 있어요.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된다... 다 못 할 짓이라는 이야기죠. 아까 교도관 된 거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러고 나면 정말 때려치우고 싶거든요. 교도관 출신들 중에 의외로 전도사나 스님이 된 사람 많아요. 그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인가봐요."-.쪽
모니카 고모는 아무 말도 없이 그가 만든 십자가를 제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기도하는 듯했다. 윤수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십자가 역시 처형의 도구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십자가형, 로마가 극악한 식민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해낸 그 형벌.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 자체로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서 대개는 그 며칠 전부터 고문이 자행된다. 죽을 만큼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눈을 뽑기도 하고, 밤새 고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은 거의 죽기 직전이라고 보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죽지 않고 며칠씩 살아 있는데, 시체를 치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들짐승들과 새들에게 쪼이며 죽어가는 것이다. 예수도 사형수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국민투표를 했대도 예수는 사형당했을 것이었다. 군중들이 성난 목소리로 죽이시오, 십자가에 매다시오,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만일 예수가 교수형을 당했다면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동그란 밧줄을 목에 걸고 다니고 동그란 밧줄을 교회 지붕에 올렸을 것이며 목이 대롱대롱 매달린 예수의 형상을 교회에 걸어놓았을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예수가 그렇게 사형수로 처형된 것이 고마웠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윤수를, 감히 위로할 수가 있었겠는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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