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손목이 시릴 때
한차현 지음 / 이른아침 / 2004년 1월
절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심부름센터를 찾아오는, 저마다 가슴 깊이 북한산 인수봉만한 고통을 짊어진 그네들이 어렵게 입 열어 의뢰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다양하다. 난잡하달 정도다. 그럴밖에, 저마다 다른 집에서 다른 밥을 먹고 다른 국을 마시고 다른 이불 속에서 다른 꿈을 꾸며 사는 이들이니까. 35년 전 초등학교 2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 연락처를 알아봐달라는 중년남자. 잃어버린 지 네 달째 되는 유치원생 딸아이를 찾아달라는 가족. 앞가슴을 짝짝이로 망쳐놓은 간호사 출신 야매 의사에게서 수술비 일체를 받아달라는 처녀. 30대 기혼여성의 가을 속옷 선호도 설문지 3천 장을 일주일 안에 받아줄 수 있겠냐는 속옷회사 직원. 여자친구를 가로채 신나게 따먹고는 끝내 버리고 만 비정의 친구를 죽여달라는 대학생이 있고 해외여행 기간중에 칠순의 치매노인을 돌봐줄 사람을 찾는 며느리가 있다. 부정한 아내와, 그녀와 놀아나는 비디오가게 총각의 가운뎃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오면 1천만 원을 내놓겠다는 고위직 공무원도 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음주 불망어와 살생 사음 망어 악구 양설 기어 탐진치의 오계五戒 십선十善을 받잡고 일심 정진하려는 의지와는 달리 입만 벌리면 천하에 못돼먹은 상소리에 추한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발 내딛고 손 뻗으면 온갖 잡스러운 짓거리만 술술 엮어져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니 착하게 사는 방법이나 그를 일깨워줄 덕 높은 스승의 연락처를 알려주면 후사하겠다는 신도도 있었다.
-.쪽

앞집 옆집 뒷집 냉장고 속 남은 반찬들처럼 엇비슷하면서도 천차만별인 상담내용과는 별도로, 사무실을 몸소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가만 살피자면 뜻밖에도 허술한 공통점이 발견되곤 한다. 도대체 심부름센터,란 데가 어떻게 생긴 곳인지,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있는 분이건 없는 새끼건,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곤 한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어째서 사무실 어디에도 야구방망이나 공기총 따위가 보이지 않느냐는 실망의 기색을 내보이고 마는 것이다. 떼인 돈을 찾아달라는, 누군가를 더 살고 싶은 마음 생기지 않게 만들어달라는, 그런 부류 고객의 경우에 특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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