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되고 참된 것만을 뱉을 자신이 없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우면 평생 비틀거나 비벼댄 시간들도 소제를 막 끝낸 서실의 서책들처럼 가지런하게 놓이는 법이라지만, 나는 아직 나를 버리고 가는 어제가 원망스럽고 나를 다시 혼돈에 빠뜨리는 오늘과 이마를 맞대고 싶답니다. 욕심이 크니 실수도 잦고 실수가 많으니 어떤 기억도 허태휘가 원하는 만큼 흘러가지 않겠지요. 나만을 위해 올챙이가 기어가듯 몇 글자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것은 위안을 바라는 나약한 인간을 위한 배려일 따름입니다. 내가 죽는 날 함께 묻혀 영원한 없음으로 돌아갈, 처음부터 짓지도 않은 글이지요. 쉰을 앞둔 지금은 스무 살 구망(句芒, 청춘)에 읊은 시들을 주워담기도 벅차답니다. 그래요.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약 달이는 창가로 불어온 봄바람이 위로의 말 속삭이지만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마자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오르는 혼령과 피 토하며 쓰러지는 푸른 이리떼가 보여요. 어릴 때 함께 뒹굴었던 외사촌들도 병문안을 와서는 내 얼굴 몰라보고 손님 대접을 하는군요. 그 서먹서먹함이란 죽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는 마음이겠지요. 동경(銅鏡)에 비친 백발을 보며 죽을 때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까요. 아예 태어나지 않았거나 빨리 늙은이가 되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요.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던 것들이 들리지 않는 고통을 몰랐던 겁니다.-.쪽
진(眞). 참된 자. 그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답니다. 당신은 비록 거짓말로 이 세상을 꾸몄지만 나만은 참된 길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삶을 스스로 택할 권리를 처음부터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거짓을 부리고픈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포기해야 했답니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그 어떤 유산보다도 '진'이라는 글자 하나의 위력이 컸던 것이지요. 참도 불쾌하고 거짓도 불쾌하니 그 둘 전부를 마음에 담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참된 곳 하나만을 향해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었지요.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요. 둥글고 부드럽게 감싸 안거나 두 눈 꼭 감고 지나쳐야 하는 자리에서도 지나치게 밝고 곧은 길만을 고집하여 귀중한 삶의 가르침들을 놓친 것은 아닐까요. 어머니는 돌멩이를 쥐듯 다섯 손가락을 모으고 세상과 만났지요. 팔목만 쥐고도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냈답니다. 상대가 지닌 물건을 만지는 것으로도 성품을 논할 정도였지요. 약한 사람이 어찌 강한 물건을 즐기고 강한 사람이 어찌 약한 물건을 좋아하겠니. 얼굴은 꾸밀 수 있으나 살갗은 거짓을 모른단다. 유독 두꺼운 옷만 고집하신 까닭도 그 때문인가요. 해웃값(解衣債, 기생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값)이 아무리 두둑하더라도 결코 옷을 벗지 않은 것도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 싫었던 탓인지 모르겠어요. 선연동(嬋娟洞, 평양기생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머니는 한 사내에게만 살갗을 허락했다고 누누이 자랑했지요. 그 말이 거짓으로 판명난 후에도 끝까지 버텼습니다. 동심결(同心結)을 주고 합환선(合歡扇)을 받는다 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천만 번도 더 변하는 법이 아닙니까. -.쪽
진(眞). 참된 자. 그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답니다. 당신은 비록 거짓말로 이 세상을 그래요. 당신은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면 무조건 참이라고 우겼답니다. 하나의 거짓을 참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더 높고 가파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어요. 그 솜씨는 재아(宰我)나 자공(子貢)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이야기야말로 세월과 싸워 이기는 유일한 방책이었어요. 시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붙잡아 쪼개고 이어 붙였지요.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당신이 만든 당신만의 시간을 뒤지고 있노라면 이 모두가 나를 놀리려는 거대한 농담이라는 생각도 든답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당신은 시간을 노끈으로 꽁꽁 묶지도 않았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통째로 가져갈까 두려웠기 때문인가요. 나와 관련된 일들, 특히 내 기억이 미치지 않는 시절을 회고하며 흐뭇해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나에 대한 당신의 끝없는 애정을 확인시키지요. -.쪽
막힐 때가 많은 인생길에서 평안한 말년을 늘 살펴야 하는 법이지만, 사내들을 대할 때마다 몸을 낮추고 뜻을 나직이 하며 오직 순종할 뿐 어긋남이 없도록 살 수는 없었답니다. 가시버시(부부)의 유별은 어디에서 오고 신분의 귀천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를 밝히고 싶었지요. 부술 것은 부수고 바꿀 것은 바꾸고 싶었습니다. 어제 홍원자(紅圓子, 배가 아플 때 먹는 환약) 한 통 들고 황매(黃梅, 노랗게 익은 매실)바람 따라서 이 누추한 곳을 다녀간 허태휘가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느냐고 묻더군요. 인간의 길을 배우고 싶었다 했더니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를 보낸 후 나를 낳은 아버지란 사내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지요. 처음부터 내겐 아버지가 없었어요. 내 이름 앞에 붙은 '황(黃)'이란 글자도 떼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가계를 밝혀야 한다면 황진이가 아니라 진(陳)진이가 옳겠지요. 위험하다 위험해! 새끼할머니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네요. 세상 밖으로 나아가 멋대로 사는 것이 훨씬 속 편한 일이란 것을 당신들께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정말 두 분을 향한 사랑을 보여드리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쪽
나의 삶이란 공명정대한 법에 대하여, 지극히 온당하며 인간의 도리를 일깨운다는 관습과 예절에 대하여, 던지는 질문에 다름아니었어요. 양반은 양반답고 아전은 아전다우며 기생은 기생다워야 한다는 규범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어찌 그것을 내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반이 남정네고 또 반이 여자일진대, 여자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서책을 가까이할 수도 없고 과거에 나설 수도 없으며 세상 일을 논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사내들을 위해 한로(韓盧, 충성심 강한 명견)처럼 살다가 죽어라.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법이며 관습이며 예절이니까요. 일찍이 스승은 문하를 받아들일 때, 적서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을 정하지 않으셨지요. 강문우(姜文佑), 이균(李均), 황원손(黃元孫) 등이 스승의 무릎 아래에서 삶의 이치를 배웠고, 게으름과 어리석음의 길에서 돌아온 나도 흔쾌히 받아주셨습니다. 애비 에미가 누구인가를 물으신 적이 없지요. 올바른 도의 맛을 함께 씹을 수 있다면, 까마득한 연하이거나 또 감히 접하기 힘든 연상이라도 상관하지 않으셨답니다.-.쪽
아, 이런 글쓰기란 처음부터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임종을 앞둔 스승은 지금까지 문하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 하셨지요. 냇물이 흐를 때, 꽃이 필 때, 새가 날아오를 때,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하더냐. 내 말을 기억하기보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의 흐름을 살피거라. 스승과는 다른 의미에서 나의 글은 세상에 보일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허태휘에게 건넨 글을 서둘러 돌려받은 것도, 이 작은 소설(진리를 담고 있지 못하는 잡된 이야기)로 꽃못과 스승의 존명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이제부터라도 삼함(三緘)의 가르침(말을 아끼며 조심하라는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내 기억에 의존할 부분이 있다면 그 모두를 허태휘의 것으로 바꾸세요. 산이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지고 말이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고 했던가요. 10년 전 스승은 나를 문하로 받아들이며 물으셨지요. 스승이 사라진 후에야 제자는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는 법이니 내가 없더라도 공부를 그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 물음의 참뜻을 알았다면 곧바로 답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스승도 없는 꽃못에 두 해 동안 머물고 또 허태휘의 부탁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 글 같지도 않은 글을 끼적거린 것도, 홀로 공부하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지요. 이젠 정말 목매기송아지(어린 송아지)에서 벗어나 제대로 공부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우린 이제 삼상(參商, 하늘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별)처럼 헤어지지만, 허태휘는 한양에서 나는 두류산 삼협(三峽, 험한 골짜기를 뜻함)에서, 천지의 무궁함을 깨닫더라도 홀로 슬픔에 젖어 눈물 흘리기로 해요. 모든 것 하늘과 땅에 맡기고 스스로 부침하며 만물 밖에 노닐기로 해요. 흔적 없이 깔리는 어둠처럼. 그 어둠을 뚫고 지나기 위해 쉼 없이 철철거리는 시내처럼. 그 위로 아득히 흘러가는 복사꽃잎처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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