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대가리, 자네를 사이린에서 보냈나?" "물론 그렇다네." "사이린은 날 미워하지. 내가 죽기를 바라고." "절대 안 그래. 자네는 자네 역할을 한 것뿐이라네. 우리 모두 우리 역할을 해야 하듯이." "내 역할이라고!" 알바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역자ㆍ모반자ㆍ폭동자 알바드가 사이린의 계획에 따른 역할을 수행했다고?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누군데? 법을 어기고, 권위에 대들고,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서 매스터 역할을 한 장본인이 아닌가? 싱어족은 세상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최고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알바드는 그 규칙을 어겼다. "난 사이린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나야말로 그들 말대로 길 잃은 자, 사이린의 실패작이라고나 할까." 그는 약간의 자긍심마저 느끼며 말했다. 자기가 세운 도시는 모두 파괴되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남은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쪽
죽은 사람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온 그 파리 같은 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보우맨은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어떻게 그토록 깊이 감추어져 있는 속마음에까지 파고들 수 있단 말인가? 보우맨은 오래전에 자기도 그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모라의 집에서 그 노파의 눈을 들여다봤을 때 자기 마음속 깊이 내재돼 있던 욕망이 고개를 쳐들고 자기를 변하게 만들었다. 이 파리도 모라의 창조물이란 말인가? 그의 마음속으로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난 더 이상 열 살 난 아이가 아니다. 내게도 이제는 힘이 있다. 보우맨은 모라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고 자신을 상기시켰다. 모라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욕망을 끄집어내는 데 독이 요구되지 않는 이상 그 파리에는 독이 없는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끔찍했다.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면? 하찮은 곤충에 물리는 것 하나로 지금의 나를 잃어버리고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장악하게 된다면? 온순하신 아버지를 독재자로 변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 정도가 아니라 살인마가…….-.쪽
발이 푹푹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케스트렐은 눈 속을 마구 걸어 나갔다.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리는 눈에 가려 천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간 후에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뺨이 차가워서인지 흐르는 눈물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케스트렐은 밀려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가슴을 두 팔로 감싸안았다. 멈포와의 대화를 통해 케스트렐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단순한 선량함, 사랑의 힘, 그리고 어떤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그의 감정 등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이 비교되었다. 자기는 단순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았다. 보우맨을 제외하고는 남을 사랑할 줄도 몰랐다. 그러니 자기는 가치 없는 인간이었다. 주지는 못하면서 받기만 했다.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남의 사랑은 얼마든지 받았다. 그리고 절대로 멈포와 같이 만족하며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삶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멈포에게선 관대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자기에게는 그러한 관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피를 얼리는 추위 속에서도 쓰라림과 분노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난 안 죽을 거야! 절대로 안 죽을 거야! 케스트렐은 자신의 불 같은 의지를 느끼면서도 자기만 살겠다고 악착같이 싸우는 자신이 미웠다. 난 왜 남을 위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짐승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난 왜 사랑을 하지 못할까?-.쪽
보우맨은 무거운 마음으로 비탄에 젖은 대지를 가로질러 갔다. 그는 인간의 두려움뿐 아니라 증오도 뼈저리게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살인자들의 열광적인 분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당신들 모두를 이해합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이 다시 창조될 수 있게끔 당신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구원받게 될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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