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이한우 지음 / 동방미디어 / 2003년 9월
품절


세종의 독서 습관이 전형적인 정독 스타일이었다는 점이다. 정독을 하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좋아하는 책이 정독에 어울리는 것들이어야 하고, 둘째는 독서자의 성격이 차분하고 끈질기게 어느 하나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쪽에 가까워야 한다. 실제로 세종은 정독하지 않을 수 없는 경학을 좋아했고 성격 또한 그러했다.
이런 독서 습관을 『세종대왕의 정치철학』의 저자 조남욱 교수는 "심득(心得 :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깨달음)의 차원에 이르는" 독서법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음으로 깨우치지 않고서는 사물의 이치에 이를 수 없다는 유교적인 독서법의 일반론을 체득한 결과이기도 하다.
세종은 세종 15년 2월 2일 자신의 이런 독서법을 예로 들면서 학자들의 과시형 다독의 독서법을 비판하고 있다. 이 비판은 어쩌면 오늘날의 이른바 책상물림 학자나 지식인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처럼 뛰어난 머리, 성실한 자세, 치밀한 독서가 한데 어우러진 학문연마의 결과 세종은 당대의 내로라 하는 학자들도 따르기 어려운 깊이의 학문과 논리적 언변을 갖추게 된다. -.쪽

개인적인 심정이야 그토록 공경하고 사랑하는 부인의 아버지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고 할 수 있는 장인 심온을 신원해 주고 싶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성품이나 세계관을 보면 천민일지라도 형벌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는 세종이다. 그러나 아버지, 신하, 그리고 국왕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거대한 체제 앞에서 세종은'개인'을 버리는 힘든 선택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쪽

통치자로서 세종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유교(儒敎), 그 중에서도 주자학(朱子學)을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만 해도 유교는 국가 이념으로서 정립되는 초창기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처럼 과도한 교조성(敎條性)을 띠지 않았다. 더욱이 세종 자신이 대학자로 불려도 좋을 만큼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전의 자구(字句)에 얽매이는 이류나 삼류 유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신하들의 경직된 경전 해석을 나무라는 장면이 실록에는 수시로 등장할 정도다. 예를 들어, 오륜 중에서'남녀유별(男女有別)'에 대한 신하들의 해석이 경직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세종 5년 10월 5일 사헌부에서 "남녀가 따로 길을 걷게 하자"는 안을 올리자 세종은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유연한 천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세종 개인의 불행했던 가족사와 중년 이후 계속된 질병이 그로 하여금 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게 함으로써 유교뿐만 아니라 풍수나 도가 혹은 불교와 심지어 무속에까지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쪽

왜 그는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집권 초기에 어떻게 보면 한가하게 보일 수도 있는 두뇌집단이라 할 수 있는 집현전을 세울 구상을 했을까? 사실 여기에는 건국초 인재 고갈이라는 현실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세종 집권 초기 인재의 부족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것은 태종이 "외교 문서 하나 작성할 인재가 없다"고 한탄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쪽

서울대 최승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집현전 37년의 역사는 크게 3시기로 나뉜다. 첫째는 세종 2년부터 세종 9년까지로 인재양성 기간이었다. 이 때는 주로 세자를 위한 서연과 세종을 위한 경연에 참석해 함께 경전들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제2기가 시작되는 세종 10년부터는 각종 서적 편찬 및 정치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한다. 제2기는 마침 우리가 대상으로 하는 세종 18년에서 끝난다. 제3기는 세종이 병들어 제대로 정사를 보기 힘들어 세자에게 국사를 넘기기 시작한 세종 19년부터 집현전이 혁파되는 세조 2년까지로 주로 정치에 관여하는 시기이다. 제3기의 모습은 세종이 바라던 집현전의 상(像)과는 정반대-.쪽

태종은 왕권을 강화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지만 세종도 그에 못지않다. 차이가 있다면 태종은 생사를 넘나드는 쟁투의 파고를 넘은 무인으로서의 카리스마와 출중한 정치력으로 새 왕조의 골격을 갖췄다면, 세종은 탁월한 지성과 가히 초인적인 노력으로 문치(文治)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써 신하들을 설복시켜 왕권 강화를 이루었다-.쪽

십이율(十二律 : 아악의 12음계)

1옥타브의 음역을 12개의 음정으로 구분하여 각 음 사이를 반음 정도의 음정차로 율을 정한 것으로,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사용되었다. 이 12음계는 저음으로부터 황종(黃鐘 : C), 대려(大呂 : C#), 태주(太簇 : D), 협종(夾鐘 : D#), 고선(姑洗 : E), 중려(仲呂 : F), 유빈(萊賓 : F#), 임종(林鐘 : G), 이칙(夷則 : G#), 남려(南呂 : A), 무역(無射 : A#), 응종(應鐘 : B)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각 율은 황종을 기본음으로 하여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써 음정을 구한다. 십이율은 음양(陰陽)의 원리에 따라 양을 상징하는 황종, 태주, 고선, 유빈, 이칙, 무역 등 홀수의 여섯을 육률(六律)이라 하고 이를 양성(陽聲), 양률(陽律), 육시(六始), 육간(六間)이라고도 한다. 또 음을 상징하는 대려, 협종, 중려, 임종, 남려, 응종 등 짝수의 여섯을 육려(六呂)라 하고, 음성(陰聲), 음려(陰呂), 육동(六同)이라고도 한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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