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골짜기의 겨울 은둔자.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 또한 아무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맛으로 말하면 무미다. 내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권태로울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잊는다.-.쪽
수십억 년 동안 생선된 천지가 하얗게, 쓱쓱 지워지고 있었다. 멀리 계곡 건너편 마을의 가물거리는 불빛도 굵은 눈발에 사라졌다. 하얀 여백으로 남는, 텅 빈 세상. 문득, 텅 빈 그 세상이 가장 풍요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 내리는 밤의 고요가 가슴 위로 쌓이고 있었다.-.쪽
인도 대륙에서는 모든 게 무거웠다. 그 무거움이 고통스러웠다.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들은 의미가 있어야만 살 수 있었다. 윤회, 인과응보라는 개념들이 없다면 하루라도 살기 힘든 땅이었다. 결국 대지의 무거움과 고통이 의미를 낳았다. 그런데 하늘이 가까운 히말라야의 레는 가벼웠다. 모든 게 가볍고 상쾌했다. 한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답고 가벼웠다. 레는 땅의 기운보다 하늘의 기운이 강한 곳이었다. 진한 쪽빛 하늘 밑을 걷노라면 하늘로 쑤욱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시간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노란 커튼 사이로 늦은 아침 햇살이 스며들 때쯤, 하늘에 엷게 퍼진 가벼운 시간은 살며시 가슴 위로 내려앉는다. 그 감미로운 설렘의 순간, 내 몸은 살짝 공중으로 솟구친다. 가벼운 설렘 속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늦은 아침을 든다. 오늘은 무얼하지라는 가벼운 고민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세상은 하얀 여백처럼 내 앞에 펼쳐져 있을 뿐. -.쪽
산업화된 사회는 공기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염시켰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정해진 약속에 따라 우리는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런 시간은 죽은 시간, 오염된 시간이다. 눈을 뜨면 그 죽은 시간들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른다. 반면 욕망이나 계획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하얗고 순수한 시간들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한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어떤 사건을 만나는가? 이런 설렘 속에서 하루하루는 늘 새롭다. 텅 빈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길 것.-.쪽
여행에서도 그랬다. 내가 첫 해외 여행지로 대만을 갔을 때, 나는 가이드북도 없었고, 해외 여행에 대한 경험도 전혀 없었다. 백지 상태였다. 다만 본능적인 힘에 의지해 길을 갔었다. 아, 그런데 그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은 어쩌면 그리도 많았으며, 우연하게 문제가 해결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 여행길은 하루하루가 불투명했지만, 늘 가슴이 설레었고, 사람들이 고마웠고, 하늘에 감사했다. 순간순간이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가이드북을 갖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의 여행은 더욱 안전해졌고, 실수는 적어졌으나 그만큼 감동도 사라지고 있었다. 안전한 길은 사람을, 삶을, 여행을 시들게 했다. 물론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너무 지식과 정보에 얽매이면 아는 것만 알고, 보는 것만 보게 되며 자신의 독창적인 시각은 점점 퇴화된다. 특히 인도는 마음을 텅 비우고 느낄 때, 오히려 더 풍요롭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 인도를 여러 번 여행해서, 어떤 곳은 뒷골목까지도 훤하게 알 정도가 되었으면서도 나는 늘 정보에 의지해 다녔으니, 한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 때문이었다. 많은 것을 보고 싶은 욕심, 더 알고 싶은 욕심, 결코 속지 않고, 손해보지 않겠다는 욕심…… 그 욕심들은 힘든 고통을 견디며 여행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 욕심 때문에 내가 더이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쪽
그후 시작된 인도 여행은 나를 몹시도 힘들게 했다. 양심적인 사람들만 만난 것도 아니었고, 낭만적인 상황만 전개된 것도 아니었다. 절대 빈곤, 거지, 바가지, 무더위 앞에서 나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인도는 내가 상상해왔던 신비, 명상, 성자들로 뒤덮인 나라가 아니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인도를 그렇게만 생각했었을까? 내가 한심했고, 세상도 한심했다. 물론 인도에는 찬란한 정신 문명이 꽃 피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 속에 그려보는 그런 인물들은 이 혼탁한 시대에는 쉽게 보기 힘들었다. 진짜는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었고, 세상에 알려진 성자, 명상가들에 대한 평판은 대개 소문에 의해 부풀려 있었다. 나는 이미지에 속았음을 알았고, 몇 개월 동안 그 혼란 속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세상도 내 감정도 모두 뒤죽박죽되고 말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화를 냈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매일같이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다. -.쪽
그렇게 하기를 한 4, 5개월 했을 때던가? 나는 마침내 체념하고 말았다. 인도에 관한 생각과 느낌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도는 내 좁은 머리와 가슴에 갇힐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성스러운가 하면 추했고, 추한가 하면 아름다웠으며, 아름다운가 하면 끔찍했고, 끔찍한가 하면 슬펐다.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땅에서, 나의 생각과 느낌은 어제 달랐고 오늘 달랐다. 그렇다. 계속 변했다. 변화만이 내 눈앞에 보이는 실상이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그토록 덧없을진대, 나의 판단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던가. 나는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듯이 인도를 그냥 바라보았다. 그때 인도가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듯이, 나는 인도에 몸을 맡겼다. 판단하지 말라. 내가 인도를 다니며 노력한 유일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