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춤을 추다가
성석제 지음 / 강 / 2004년 2월
구판절판


이백(李白)이 말했다.

"옛사람이 등불을 들고 밤늦도록 놀았다 하니 진실로 뜻이 있으리.
하물며 지금 화창한 봄날이 아지랑이 일렁이는 경치로
나를 부르고 대자연이 나에게
아름다운 문장을 빌려주지 않았는가."

추억이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다.
아물었을 상처를 싸맨 붕대를 천천히 풀어보는 느낌을 일깨워주었다.-.쪽

좋은 친구를 둔 덕분으로 나는 이런 경험을 해보았다. 사람들이 번잡하게 오가는 골목. 사람들은 대체로 점심 때까지 잠을 자는 잠꾸러기 아가씨들을 찾아오는 사내들과 아가씨들에게 갖가지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이다. 간밤에 누군가 쏟아낸 토사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고 허름한 이층 가건물 옥상에는 원색의 속옷들이 나부낀다. 개구멍은 이처럼 성과 속이 교차하는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 절묘하게 숨어 있다. 또한 개구멍은 아는 자만이 안다는 수줍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주 안 가면 잊어버린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그 개구멍을 드나들던 존재가 환골(換骨)하여 개구멍의 추억을 개구멍처럼 제 속에 가지고 산다는 점에서 개구멍은 진정 개구멍이다. 개가 드나드는 구멍이 개구멍이고 구멍 중에 좀 질이 떨어지는 구멍이 개구멍이다. 구멍 중 질이 좀 떨어진다? 그렇다. 개구멍은 어떤 용도를 가지고 있으며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혹은 犬爲的?)으로 뚫었다는 점 때문에 그냥 존재하는 구멍보다 열등하다.
하여튼 나는 좋은 친구를 둔 덕분으로 개구멍들을 알게 됐다. 기차역 주변의 온갖 색스러운 풍경들을 맨주먹 붉은 피로 감당하면서 가긴 갔다. 개구멍은 허술한 철조망 사이로 나 있기도 하고 철도원 전용식당에 나무문으로 천연스럽게 뚫려 있기도 하고 정말 개처럼 몸을 구부려 살살 기어나가야 되는 개구멍 그 자체의 성질을 가장 잘 살린 구멍으로 나 있을 때도 있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개똥과 입을 맞출락말락하며 기어들어가야 하는 개구멍이다. 그 개구멍을 지나면 힘차고 화려한, 무한으로 가는 세계가 열린다. 곧 기차를 탈 수 있는 것이다.-.쪽

좋은 친구는 내게 기차 속에서 승무원에게 적발되지 않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첫째는 승무원을 만나지 않는 방법이다. 승무원이 올 낌새가 보이면 화장실에 가서 죽치거나(고전적 수법), 아니면 화물을 얹어놓는 시렁에 올라가서 화물 옆에 몸을 숨기거나(양상군자와 투명인간의 중간 수법), 또 그도 아니면 기차 맨 뒤칸의 문을 열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방법(할리우드 영화의 수법)이 있다. 능력이 있다면 연결 통로를 파고 들어가 기차 바퀴 옆에 몸을 숨길 수도 있겠다(광부와 서커스단의 응용 수법). 두번째는 기차표, 혹은 그와 유사한 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기차표를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개구멍을 이용하느냐고? 버릇이라고 하자. 개구멍을 이용하지 않으면, 그곳을 통해 들어가 환희처럼 열리는 진정한 기차의 세계를 맛보지 않으면 기차를 아무리 타도 탄 것 같지 않은데 어쩌랴. -.쪽

As boys, they made a pact to share their fortunes, their loves, their lives.
As men, they shared a dream to rise from poverty.
Forging an empire built on greed, violence and betrayal, their dream would end mystery that refused to die.
소년들이 아직 어렸을 때, 그들은 부와 사랑과 목숨을 나누자고 약속했네.
나이 들어 어른이 되자,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보자는 꿈을 나눠 가졌다네.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들의 꿈은 스러지지 않는 신비로 남고 말았네.-.쪽

얇은 얼음이 발 밑에서 부서진다. 사진을 찍으러 온 듯 예쁜 신랑 신부가 포즈를 잡고 있다. 눈을 깜빡이면 못 쓴다고 사진사가 나무란다. 신부는 자꾸 눈물이 난다고 조그맣게 대답한다. 아름답고 젊은 날이다. 이 뜨락도 젊고 아름다운 이들로 그득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세속에 발을 헛디디지 않겠다는 다짐도 오갔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맹약은 어디로 가고 담이 남고 돌 위에 쌓은 집만 남았다.
계곡 상류 쪽으로 담 한구석이 열려 있다. 원래 문(五曲門)이 있던 자리라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담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담이 허물어져 물이 흘러드는 것이 아니다. 원래 담을 세운 이는 물 속 바위에 오층으로 돌을 쌓고 기다란 돌 두 개를 맨 위에 놓아 담을 받치게 했다. 문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물은 여전히 흐른다. 흘러 개울을 이루고 연못을 채우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이 흐름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담으로 물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흐르는 물을 본다. 사시사철 흐르는 물을 보고 또 본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세게 약하게 거칠게 부드럽게 물은 흐른다. 물이 내 안에 흘러와 마음을 고즈넉이 흘러가도록 버려둔다.
흘러라, 인연이여, 역사여.
거죽뿐인 육신을 더듬거리는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달빛이여, 그림자여, 내 마음이여.
그 사람은 없다. 그의 벗들도 없다. 그 마음, 그의 집이 남았다. 담이 남았다. 눈과 겨울이 남았다. 대나무의 푸른빛이 남았다. 가야 할 눈길이 남아 있다, 내게.-.쪽

미리 말하지만 내 인생을 바꾼 책은 없다. 바뀌는 과정에 동반하거나 우연히 읽게 된 책은 많다. 교과서와 참고서가 그렇고 허다한 잡지가 그렇고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읽은 '리어카에서 파는 책'이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총각이었을 때도 책에 우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책, 나쁜 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은 풀을 먹어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을 불가(佛家)의 책을 읽은 사람에게서 들었는데(그런데 어떤 뱀이 무슨 풀을 먹는지 그 자리에서 물어보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책이 그 풀이겠다.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을 하고 소설을 많이 읽었다. 출발점이 된 것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열 권쯤 되는 책이었는데 출판사로 직접 가서 도매금으로 싸게 샀다. 2할쯤 할인을 해주었다. 리처드 버턴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친구 집에서 빌려와 읽었는데 이 역시 권수는 세 권이었지만 내용은 열 권 이상이었다. 내가 읽은 소설 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책으로 기억한다.
-.쪽

그 다음으로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었다. 아홉 권인가 열 권인가 되는 분량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그 책은 홍명희가 북한에서 부수상인가 하는 고위직을 지냈다고 해서 금서의 목록에 올라 구하기가 어려웠다. 고소하고 향긋한 우리말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하게 재미진 이야기인데다 금서 목록에 올랐다는 양념까지 듬뿍 쳐져 있었으니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얼마나 서운했던지. 게다가 그 이야기는 미완성이었다(나중에 홍명희의 아들이 나머지 부분을 보충해서 완간했다. 그런데 이것도 완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내친김에 황석영의 『장길산』 열 권을 읽었다. 그러고 나니 한두 권의 짧은 소설은 너무 빨리 끝나는 것 같아서 첫 장을 펴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아예 동대문의 도매 시장에 가서 전집을 사들였는데 중앙일보사에서 낸 오늘의 세계문학전집 30여 권, 삼성출판사의 한국현대문학전집 60권이 아직 남아 있다. 여기까지의 교훈:책은 제 돈을 들여 사서 읽으면 반드시 본전이 돌아온다.
길고 긴 이야기의 숲에 들어가 있다 뒤로 가면 갈수록 나무 그늘이 옅어지며 '현실'이라는 명찰을 단 태양의 햇빛이 비쳐드는 게 두려웠다. 지금은 각각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길고 긴 이야기책들에서 아름다운 두려움을 얻었다.-.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