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쪽지 시험 보는 거예요?" 저런 걸 물어 보다니, 정말이지 보리스다운 짓이다. 또 백점을 받고 싶은 게지. 나도 물론 백점을 받고 싶긴 하지만, 저런 걸 물어 볼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 거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가장 끔찍한 건, 친구들에게 죽어라고 공부하는 아이로 낙인찍히는 거다.-.쪽
샘의 방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유리 조각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깨진 창문에는 비닐이 붙어 있었다. 이불솜이 탄 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전혀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고, '거의' 일어나지 않은 거다. 유리창에 구멍이 뚫려 있고, 손은 이렇게 아프고, 그리고 곰 인형이……. 그렇지, 곰 인형! 곰 인형이 어디 있지? 아까 소냐에게 보여 주고 나서 침대 위에 올려 뒀는데……. 그 곳에 없었다. 방안을 다 뒤져 보았지만, 곰 인형은 보이지가 않았다. "샘, 어디 있니? 이리 오렴!" "엄마, 내 곰 인형이 없어졌어요." 엄마는 처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더니, 잠시 후 샘의 방문 앞으로 와서 섰다. 그리고 뭔가 불편한 일이 생겨서 샘더러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충고할 때와 같은 억양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샘, 네 곰 인형은 불에 타 버린 데다 물에 젖기까지 해서 더 이상……." 샘은 엄마를 옆으로 밀친 뒤 부엌의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곰 인형은 찻잎 찌꺼기 속에 파묻혀 있었다. 곰 인형을 황급히 끄집어 낸 다음, 개수대로 가져가서 찻잎을 털어내었다. 그러고는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흐르는 물에 곰 인형을 손으로 문질러 씻었다. 손을 한쪽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씻기가 무척 힘들었다. 손에 감은 붕대가 물에 젖자 상처가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쪽
샘 엄마는 자기가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독일에서 산 지 오래되다 보니, 돌아가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고향으로? 집으로? 그것이 어디 있는데? 태어나서 자라던 마을과 부모님, 그리고 가족은 더 이상 그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리트레아는? 에리트레아는 이제 전쟁이 끝나고 한창 재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샘 엄마는 새롭게 세워지는 에리트레아에 이렇다 할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에리트레아보다는 독일에서 사는 게 더 익숙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다 접어 두고 독일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샘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자라도록 하고 싶었다. 샘만큼은 자신들보다 더 잘살기를 바랐다. 적어도 난민 수용소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올바른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 매일같이 배불리 먹고, 학교에도 가고, 피아노도 치고……. 불안이나 공포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았다.-.쪽
샘의 상상은 늘 여기에서 멈추었다. 바로 이 대목이 피부가 흰 보리스에게 샘이 멋지게 한마디 던지면서 제대로 꼬집어 주어야 할 시점인데……. 이 순간에 이를 때마다 상상이라는 놈은 샘이 원하는 것이랑은 상관없이 제 멋대로 나래를 펼치곤 했다. 상상 속에서 샘은 허여멀건 얼굴의 보리스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는 대신, 그 아이에게 살며시 다가가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옆자리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생겨서 겪는 어려움이 어떤 건지 난 잘 알아. 난 네 피부가 흰색이든 갈색이든 상관없어." 이미 말했지만, 이런 결론은 정말이지 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상은 늘 이쪽으로 흘렀다. 다른 방향으로는 도무지 이어지지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게 어떤 건지, 그래서 교탁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아이들이 마구 웃어 댈 때의 심정이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쪽
샘에게 피부 색깔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였다. 독일 사람들 중에는 피부색을 진한 갈색으로 바꾸기 위해, 한여름에 햇볕에 나가 그을리려고 안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선탠 오일을 듬뿍 바른 채 몇 시간씩이나 해변에 드러누워 있으면서……. "갈색 피부는 아름다운 거야.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는 건 건강하다는 뜻이니까." 지난 여름, 북해로 놀러 갔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샘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갈색이라는 것은, 샘에게 어디서나 남들 눈에 확연하게 띈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늘 자신의 피부가 하얀색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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