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유리왕이 환궁하면서 신록이 우거진 버들가지에 황금 같은 꾀꼬리들이 짝을 지어 노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이 시를 <황조가>라고 한다.
편편황조(翩翩黃鳥) 훨훨 나는 꾀꼬리들이여
자웅상의(雌雄相依) 너희들은 암수 서로 화합하는데
염아지독(念我之獨) 나 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수기여귀(誰其與歸) 그 누구와 같이 노닐거나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로 알려져 있다. 유리왕이 치희를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한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의 세력은 화희의 출신인 골천 호족을 제압할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던 모양이다. 화희는 골천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하는 유력자의 딸이었던 것이다. 한족의 딸인 치희가 쫓겨났음에도 별다른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고, 또 골천 출신의 화희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유리왕은 골천 세력을 배제하고는 왕권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쪽
유리왕은 졸본성에서 민심이 돌아서는 바람에 국내위나암성으로 천도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자 해명은 유리왕의 의도와는 달리 유리왕의 천도 후에 졸본성에 남아 그곳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태자 해명은 황룡국의 활을 꺾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과시했던 것이다. 이것이 유리왕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으며, 훗날 태자 해명이 모반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결국 유리왕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태자를 2명이나 죽인 왕이 되고 만 것이다.
옛날 중국에는 장자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을 경우에 장자에게 큰 죄명을 씌워서 스스로 자결을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장자를 제거함으로써 둘째, 셋째 아들의 왕위 계승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 태종에게 왕자가 셋이 있었으니, 양녕과 효령과 충녕이다. 태종은 처음에는 장자인 양녕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그러나 태종은 어진 사람을 책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양녕을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고자 했다. 태종은 양녕보다는 충녕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눈치 챈 양녕대군은 일부러 왕자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다님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둘째 아들 효령은 양녕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고는 잠시 왕세자 자리에 뜻을 두었다가 이내 아버지의 뜻을 알고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