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사랑없이 살 수 없을까 - 청동거울 이야기 2
톨스토이 외 지음, 박윤정 옮김 / 청동거울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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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틀 내내 풀쐐기는 캐시디의 작은 마분지 상자 안에 있었다. 거기 마분지 상자 안에 재비어가 있다는 것을, 그 어두운 방 안에 재비어와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 작은 풀쐐기가 티모시 목사님도, 그 외의 다른 모든 걱정거리들도 잊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초록색의 작은 풀쐐기가 있는 한 캐시디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 풀쐐기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캐시디는 아마 자신을 티모시 목사님이 왜 이 숨막힐 듯한 방 안에 가두어 놓았는지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길다랗고 작은 풀쐐기는 이미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근심스런 눈길로 캐시디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오!" 캐시디는 갑자기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그만 마분지 상자를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복도를 걸어오는 귀에 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티모시 목사가 방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자, 캐시디. 이젠 정신 좀 차렸겠지?" 그러나 목사의 눈엔 캐시디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캐시디는 목사에게 등을 돌리고 선 채 얼굴 가득 햇살을 받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풀쐐기를 상자 안의 이끼 조각 위에 다시 올려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풀쐐기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 난 다음에야 캐시디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쪽

"캐시디! 그게 뭐냐?" 등 뒤에 서 있던 목사가 큰 소리로 고함을 치자, 캐시디가 주춤주춤 돌아서면서 말했다.
"아...... 아무것도...... 저, 목사님......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
"뭐가 어째! 고작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죄를 뉘우칠 생각은 않고, 엉!"
"죄요? 저...... 티모시 목사님...... 저...... 그건 그냥 작은 풀쐐기예요."
목사에겐 캐시디의 침묵보다도 이런 말대꾸가 더욱 불쾌하게 여겨졌다. 캐시디의 귀를 잡아당기며 목사가 소리쳤다.
"이러고 있는 게 죄를 뉘우치는 거냐? 엉? 이러고 있는 게 사죄의 말을 생각해내는 거야? 이 못된 놈! 그것 당장 이리 내!"
"그냥 풀쐐기인데요, 목사님. 그냥 작은 초록색 풀쐐기일 뿐이에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부드럽고 색깔도 아주 이뻐요. 꼭 저를 잘 아는 것처럼 제 손가락을 타고 기어오르기도 해요. 제발, 목사님. 제가...... 저, 이렇게 하루 종일 저 혼자 여기 앉아 있는 동안, 그게 절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제...... 제겐...... 그게 꼭 있어야 돼요."
"이놈이 감히!" 목사는 캐시디에게서 마분지 상자를 빼앗아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거꾸로 쏟아냈다. 방바닥에 떨어진 풀쐐기는 다시 느릇느릿 기어가기 시작했다.
"감히 미사를 빼먹어? 너 같은 놈에겐 행복할 권리도 그 어떤 권리도 없어! 내 말 알아들어?" 그러면서 목사는 그 연약하고 아름다운 곤충을 무지막지하게 큰 발로 잔인하게 짓밟아 뭉개 버렸다. 그런 목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캐시디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쪽

무언가 좋은 것들을 점점 더 많이 맛보게 되면서 오히려 인간은 인생의 달콤함에 더욱더 굶주리게 되어 버린 것 같아. 그리고 미덕이란 넝마조각들로 온몸을 둘둘 휘감은 채 자만심이란 뿌연 연막을 치고 타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완벽을 확신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정말로 어리석게, 아주 잔인하게 되어 가고 있네. 흔히들 말하는 타락 계층만 해도 그래.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타락 계층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나도 알고 싶어. 그들도 우리처럼 뼈와 살이 있고 피가 흐르며 정신이 있는 인간이야. 이런 얘기는 오랜 세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미 수도 없이 들어온 거지. 정말이야. 하지만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악마만이 알고 있네. 휴머니즘의 커다란 설교 소리는 완전히 소멸해 버린 걸까?
사실, 인간들 모두가 타락한 사람들이야. 그것도 굽힐 줄 모르는 자만심과 우월감의 심연 속으로 깊이깊이 추락해 버린 인간들이지. 아! 하지만 말해 무엇하겠나? 그런 상황은 저 산만큼이나 변함없는, 아주 오래 된 사실인걸. 다시 말하는 게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지. 그래, 아주 오래된 사실이야. 정말 문제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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