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사진의 여자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7월
절판


"네게 있어서 최대의 문화쇼크는 뭐야?"
세이케는 커피를 마시면서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을 나는 말했다.
"시차."
"시차?"
"응. 교토는 아침도 빠르고 밤도 빨라. 일출이나 일몰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냐. 생활하는 시간이 동경과는 한 시간이나 차이가 나."
실제로 교토라는 고장은 일출과 함께 일어나 밤이 되면 얼른 잠자리에 든다는 인상이 들었다. 야행성의 수험생활을 보냈던 내게 있어서 그건 정말 불편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의외의 대답이었겠지만, 총명한 세이케는 나의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분석했다.
"그건 말야, 동경이 잘못되어 있는 거야."
"어째서?"
"동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원래 주행성 생물이니까 태양과 함께 행동해야지.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밤중에 일어나 공부를 하는 것은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야."
"아냐, 그렇지 않아. 인간이 만든 문화가 그런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거야. 인간의 생리도 그에 맞춰 진화해야 해."
오호, 하고 나의 반론을 세이케는 일단 받아들였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것으로 우리는 논쟁을 벌일 만큼 친해졌다.세이케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쪽

"밤새는 일을 과연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좋아, 그럼 변화라고 바꿔 말할까? 그래도 마찬가지야."
"아냐, 달라. 인류의 생활형태의 변화에 따라 생리도 변화한다는 것은 말야, 요컨대 변화의 요인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 돼. 그렇다면 너의 생각은 이른바 정향진화설(定向進化說)로, 이 학설은 오늘날 진화론상의 근거로는 약해."
세이케의 논리는 명석하고 간결하여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느낀 것은 토론분야가 그의 전공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머리 구조부터 다르다.
나도 조금은 배운 게 있는 척 자랑했다.
"요컨대 정향진화설은 진화론의 상식으로 간주되는 자연도태설과 대립한다는 거구나."
세이케는 끄덕였다.
"그래. 생물의 진화요인이 생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지 외부의 환경변화에 의한 것인지, 그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자명할 거야. 이를테면……."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순간 섬뜩했다.
"넌 이제부터 너 자신의 변화를 잘 관찰해 봐. 넌 지금 교토의 풍습을 거부하고 있을 거야. 그건 너의 내부에 미리 변화의 요인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야. 하지만 넌 변화한다. 교토란 고장이 너를 자연도태시킬 거야."
-.쪽

나는 문득 전날 영화관 로비에서 세이케가 한 말을 떠올렸다.
"과연. 그러면 동경대에 들어갔지만 사투리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중퇴했다는 너의 선배, 그 사람은 동경의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거라는 말이구나."
말이 끝나기 전에 세이케는 웨이트리스가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브라보. 미타니, 어쩐지 너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한 후 세이케는 일어났다.
큰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나는 칼날 같은 세이케의 말을 반추했다.
교토란 고장이 너를 자연도태시킬 거야……. 그러니까 세이케는 환경변화에 당황하는 나를 그런 말로 격려해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우정에 대해 감사하기보다 먼저 나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도태당하지 않기 위해 학문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 수험과목에 생물을 선택한 나의 지식에 착오가 없다면…… 자연도태설이란 열악한 것은 쇠퇴하고 우량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그것은 오늘날 진화론상의 상식인 것이다.-.쪽

한량이었던 조부모의 영향으로 열렬한 영화 마니아로 자란 나는 장차 가능하다면 영화관계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립대 출신의 이른바 말단 공무원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내게 노골적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아버지의 주정 섞인 푸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나의 꿈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
전형적인 관료가정에서 자란 나는 전혀 자기 주장이 없는 얌전한 성격으로 학생운동에도 최신유행에도 전혀 흥미가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일관 교육이었던 전 학교의 친구들은 모두 뻔한 미래를 믿고 있었으며, 어쩌다 취미와 맞는 인생을 가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뜻을 위해 집단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영화는, 그런 내게 있어서, 그야말로 현실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의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쪽

"……그렇지만, 도련님. 저는 게이샤입니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남자에게 웃음을 파는 게이샤입니다. 그야 물론 여자이니 사랑도 해보았겠지요. 돈 때문이 아니라 정말 마음속으로 남자를 사랑하여 안겨도 보았겠지요. 그렇게 몸과 마음을 불태우며 안긴 채 맹세했습니다. 나는 게이샤야, 이 사람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여자니까, 꽃도 열매도 있는 남자에게 빠지면 안 되는 거야…… 네에, 도련님.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도련님께 안긴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이렇게 도련님 옆에서 도련님의 향기를 맡고, 목소리를 듣고…… 그것만으로도 저는 도련님의 색에 물들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할 수 없어도 좋습니다. 도련님의 등뒤로 말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고집부리지 않겠어요. 저는 도련님을 사랑해요. 어젯밤에도 도련님에게 안기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목을 매고 싶다,고. 저는 도련님을 정말 사랑해요……."-.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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