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때, 징그러울 정도로 명확한 인간존재의 이 윤곽은, 다른 것과 확연히 구분하는 이 차가운 선은 - 아아, 형식! 곰브로비치 '페르디두르케'에서 -.쪽
어느 날, 암흑의 세계에 지진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 세계 전체가 경련을 일으키며 흔들리더니 부드러운 벽이 나의 다리와 머리를 조여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배꼽에 붙어 있는 밧줄에 엉겨붙었다.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괴로워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밧줄이 엉켜 있는 내벽이 열렸다. 수액이 점점 흘러나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에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 나는 머리에 엄청난 힘의 압박감을 느끼고 단말마의 비명(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을 들었다. 그것은 여자의 비명인 듯했다. 그러자 갑자기 섬광이 번쩍했다. 그것은 태아인 나의 죽음을 알리는 빛이었다.-.쪽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도쿄와는 언어도 민족도 풍습도 다른 지방도시의 지사로 좌천되어, 우리 가족은 수도를 잃고 말았다. 거기서 나는 지금까지 이웃에서 볼 수 없었던 같은 연배의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어린아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줄 알고 있다가 유치원이란 곳에 감금되어 백 명도 넘는 난폭하고 교활하며 미개한 어린이 사회에서 스스로 생활권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제2의 존재론적 위기가 나를 덮쳤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소꿉장난도 하며, 또 싸움질도 하는 그 장소에서 나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 똑같은 소꿉장난을 하고, 나와 똑같이 싸움에 약하고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나의 복제품들을 발견했다. 그 복제품은 내 흉내를 냈다. 내가 그네를 타려고 하면 복제품도 같은 것을 생각했다. 그러면 그네 쟁탈전이 벌어진다. 나는 항상 복제품에게 그네를 가로채이고 말았다. 손가락을 입에 물고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멍청이 같은 나. 이럴 리가 없다고 너무도 심한 불만 때문에 무릎을 달달 떠는 나. 나는 보모에게 귀여움 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을 어필하는 데 나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가진 다른 원생의 들러리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히 주인공이고 왕자인데. 나는 왕자답게 행동하기 위해 백 명이나 되는 원생들의 흉내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와 동생을 바꾼 것처럼. 그것은 너무도 귀찮은 일이기도 했고, 또 반드시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미개사회는 강한가 약한가, 잘 하느냐 못 하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판단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 양극단에 있는 자가 왕자였다. 그러니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 나는 아무리 굽고 삶아도 별볼일없는 존재일 수밖에. 권세를 부리지도 않지만, 놀림감이 되지도 않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존재이니 왕자가 될 수도 없다. 나의 복제품들은 빗나간 로또만큼 많았다. 이놈도 저놈도 하나같이 왕자가 되고 싶어했다. -.쪽
죽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혼자 이 세상에 남겨두는 것은 너무 불쌍해 고뇌하다가 결국 일가족 몽땅 자살 쳇, 일본에는 이런 바보자식들이 너무 많아. 살건 죽건 모두 사이좋게 한꺼번에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나는 자신의 의지로 죽지 않은 사람을 생각하면 진짜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는다. 바보니까). 그들의 어리석은 행태를 교훈으로 삼아 나는 오리지널 죽음을 만들어내고 싶다. 나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리면, 엘리트 샐러리맨에게 달라붙어서 감염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맞아 죽고 싶고, 농담이 아니라 핵전쟁이 진짜로 일어난다면, 도쿄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길거리에서 외쳐대다가 양식 있는 시민에게 맞아 죽고 싶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냥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주어진 죽음을 바보같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부모님이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죽음을 선택할 거예요. 미시마 유키오처럼. 그러나, 나는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자(死者)의 은유가 될 거야. 그것 역시 타인이 만든 현실을 자신의 손으로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다. 아마도…… 아쿠마 카즈히도는 내 속의 사자, 그것도 과대망상을 먹고 사는 사자임에 분명했다. -.쪽
나는 아쿠마 카즈히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아쿠마 카즈히도는 수수께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놈은 타인의 몸이나 사고회로를 복사하는 기계다. 인간이란 '나'와 '저'의 부분과, 아쿠마 카즈히도라든지,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모조인간의 부분이 억지로 합성된 존재이다. '나'는 유전자나 단백질의 번역기계, 유기적인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조인간은 타인의 의식 속에 사는 '나'의 환상이며, '나'의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타인들의 환상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부분이 꼬여 있기 때문에 이상해지는 것이다.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들은 '나'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환상작용 없이는 활동하지 않고, 타인의 의식 속에 사는 '나'의 환상은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의 활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몸이 가벼웠다.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의무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죽어버린 것이다. 지금부터는 건강한 사체로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득을 봤다. 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존재감은 희박해지고, 모조인간만이 남을 것이다. 나는 모조인간으로서 어떤 것에도 나를 동일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 발아래 펼쳐진 안개의 스크린에는 전장 10미터나 되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나의 것이다. 마침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무지개색의 동그라미가 걸려 있다. 모조인간은 이 브록켄의 요괴다. 나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저 그림자의 손에 달려 있었는지 모른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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