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민족이란 코드로 읽고 그에 맞추어 얼개를 짠다면, 민족이란 코드에 걸려들지 않는 무한한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장구한 시간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추상화시켜버린다면,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던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줄 것이며, 서북 사람의 억울한 사연은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실제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은 과연 나날을 살면서 한국 민족임을 의식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상놈으로 종놈으로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렇듯 민족이란 이름으로 모두를 뭉뚱그리는 순간 개똥이, 말똥이, 소똥이는 사라진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족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던, 혹은 '민족'과 공존했던 '근대'와 '민중'이라는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와 민중 역시 민족과 동일한 왜곡과 배제의 폭력을 휘둘렀음은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정치독재보다 더 근원적인, 정치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독재의 기원이 아닐까? 민족이나 근대, 민중 등 거대하고 중심적인 코드를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쪽
역사를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지만, 나의 아마추어적 견해로는 인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다. 다만 그 변화가 매우 더디거나 혹은 돌연적일 뿐이다. 한편 인간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는 존재다. 현재의 인간은 시간적 변화의 산물이며, 역사학은 바로 변화하는 인간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나는 어떤 교훈적, 목적의식적, 기념비적 역사관도 믿지 않는다. 시간 속의 인간을 읽는 코드는 무수한 복수다. 예컨대 한국의 역사학은 성(性)에 관한 담론을 배제하지만, 나는 성이야말로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녀'를 예로 들어보자. 열녀 담론은 도덕적 담론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남성이 여성의 성을 독점하기 위해 제출한 책략이다. 열녀의 문제는 곧 섹스의 문제인 것이다. -.쪽
도둑이 영웅되는 사회 양산박(梁山泊)의 군도를 그린 <수호전(水滸傳)>은 지금도 읽히며 영화나 비디오로도 가공된다. <홍길동>은 조선시대에 이미 소설화되었고, '임꺽정'은 일제시대에, '장길산'은 해방 이후에 모두 소설화되었다. 소설이 아닌 실제의 홍길동과 임꺽정, 장길산은 과연 의적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탐관오리만을 응징하는 그런 도둑이었을까? 사료를 보건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아름답게 남는다. 부정직한 체제와 지배자에 대한 저항만으로도 그들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도둑을 영웅시하는 사회는 어딘가 곪아 있는 병든 사회다. 병든 체제에 대한 저항이 군도가 형성한 이미지인 것이다. 임꺽정 부대가 활동할 당시 사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 도적이 생긴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부득이 도적이 되어 하루라도 연명하려고 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과연 누구인가. 권세가의 문전이 시장을 이루어 공공연히 벼슬을 팔아, 무뢰한 자제들을 주군(州郡)에 나열하여 백성들을 약탈하게 하니 백성이 어디로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 《명조실록》 16년 10월 17일
그리고 구체적으로 윤원형(尹元衡)과 심통원(沈通源)을 두고 "물욕을 한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도 못하는 짓이 없는" 대도(大盜)라 하였다(《명종실록》 16년 1월 3일). 조정에 있는 권세가가 대도란다. 신문이며 방송에 나날이 나는 소식을 보니, 과거 군도가 설치던 시대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땡추와 김 진사가 사뭇 그립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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