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챔피언
로알드 달 지음, 정해영 외 옮김 / 강 / 2005년 11월
절판


"잘 봐둬. 개한테 죽일 대상을 주는 거야."
클로드가 속삭였다.
자루에서 풀 위로 작고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굴러 나왔다. 하얀 솜털이 복슬복슬하고 순한 새끼토끼였다. 토끼는 몸을 일으킨 뒤 토끼가 흔히 그러듯 코를 땅에 가까이 댄 채 가만히 웅크리고 앉았다. 겁에 질린 토끼였다. 자루 속에 있다가 갑자기 풀밭 위, 눈부신 빛 속으로 나왔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이제 미친 듯이 흥분한 개는 펄쩍펄쩍 뛰면서 줄을 잡아당기고 땅을 할퀴는가 하면 연신 낑낑거리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순간 토끼도 개를 보았다. 공포로 온몸이 마비된 토끼는 목을 움츠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줄을 잡았던 손으로 개의 목걸이를 붙들자, 개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뒤틀고 펄쩍거리면서 손을 뿌리치려 들었다. 다른 남자가 토끼를 발로 밀었다. 하지만 토끼는 겁에 질린 나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토끼를 축구공처럼 가볍게 찼다. 토끼는 몇 바퀴 데굴데굴 굴렀다가 몸을 바로잡은 뒤 개 반대쪽으로 풀밭 위를 뛰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가 개를 풀어주자 개가 한 번 크게 뛰어올라 와락 토끼를 덮쳤으며, 곧이어 깩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괴로움에 찬 날카로운 비명이 꽤 오래 이어졌다.
"바로 저거야. 개한테 죽이는 법을 가르치는 거지."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저런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고든. 경기 전에 개를 흥분시키는 거지."

=>경기에서 이기거나 지기위해서 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이 무척 잔인하게 느껴집니다.-.쪽

"말이 없겠죠, 네?"
부인이 물었다.
"당연히 말이 없죠."
불평도, 비난도 없을 테고, 끝없이 늘어놓던 훈계도 없을 테고, 지켜야 할 규칙도 없고, 담배를 못 피우게 하지도 못할 테고, 저녁이면 책을 읽으며 쳐다보던 못마땅해하는 눈도 없고, 셔츠를 빨 필요도, 다릴 필요도, 식사 준비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짜증 나는 거라곤 인공심장 소리뿐이지만, 별로 시끄럽지 않으니까 텔레비전 소리를 방해하지도 않겠지.
펄 부인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갑자기 이이에게 엄청난 애정이 느껴져요. 이상하게 들리세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렇게 작은 대야 속에서 물 위에 뜬 채 무력한 모습으로 조용히 있잖아요."
"예, 압니다."
"아기 같아요. 바로 그거예요. 작은 아기 같아요."
랜디는 그녀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기요."
부인이 조용히 대야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저 혼자서만 당신을 돌보겠어요. 이제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언제 이이를 집에 데려갈 수 있나요, 선생님?"
"뭐라구요?"
"이이를 언제 데려갈 수 있나요? 그러니까 집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요?"
"농담이시겠죠."
(중략)
랜디는 펄 부인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여자야. 랜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이 대야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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