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싱의 고백 -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조지 기싱 지음, 이상옥 옮김 / 효형출판 / 2000년 12월
절판


오랜 친구이자 오랜 적이기도 했지!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할 필요성을 혐오하면서 머리와 마음이 무겁고 게슴츠레한 눈에 떨리는 손으로 펜대를 잡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잉크로 더럽혀져야 했던 하얀 원고지들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무엇보다도 오늘 같은 날, 봄의 파란 눈이 장밋빛 구름 사이로 웃음 지어 보일 때면, 그리고 햇빛이 내 책상 위에서 번쩍이는 것을 보고 내가 꽃피는 대지의 향기랑 언덕 위의 낙엽송에서 피어나는 초록빛 싹이랑 구릉 위에서 노래하는 종달새가 그리워 거의 미칠 지경이 될 때면, 원고 쓰기가 어느 때보다 더 두려웠다. 내가 열렬히 펜을 잡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보다도 더 먼 옛날인 듯하다. 그때는 내 손이 혹시 떨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작가 생활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나를 배반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글의 어느 한 페이지도 문학사 속에 살아남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론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으며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을 품은 것은 철없는 젊은 시절의 과오였고, 피치 못할 상황 때문에 그 과오를 계속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쪽

세상 사람들이 내 작품을 부당하게 대접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독자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며 세상을 원망하는 일만은 하지 않을 만큼 현명해졌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설령 불멸의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세상사람들의 냉대에 어찌 분노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 작가에게 책을 내라고 권한 적이라도 있단 말인가? 누가 그에게 글을 쓰면 읽어주겠노라고 약속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누가 그런 약속을 저버린 적이라도 있는가? 가령 어떤 제화공(製靴工)이 훌륭한 구두 한 켤레를 만들어주었는데 내가 짓궂게 심통을 부리며 구두를 내던진다면, 제화공은 이 부당한 대접에 대해 불평할 만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시나 소설로 말하자면, 누가 그것을 사서 읽어주겠노라고 흥정한 사람이라도 있단 말인가? 성실히 쓴 작품인데 아무도 사서 읽어주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우리 자신을 불운한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또 하늘에서라도 떨어진듯 훌륭한 작품이더라도 사람들이 많은 돈을 써가며 작품을 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개한다면 이를 결코 떳떳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쪽

인간의 정신이 빚어내는 창작품의 가치를 시험하는 방도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가 어떻게 판정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위대한 작품을 한 편 썼다면, 다가올 세상이 그 작품을 알아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죽고 난 이후에 누릴 영광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대는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서 생전에 명성을 누리고 싶어한다. 아, 그러면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대의 욕망대로 용기를 가져 보라. 그대 자신이 장사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 그대가 내놓은 상품이 이미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는 다른 수많은 상품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주장하며 신이나 인간을 향해 항의해 보라. 그 항의가 정당할 수도 잇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그대의 상품이 진열된 곳을 세상의 유행이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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