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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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는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自己回歸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 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고'에 대한 탐구다.-.쪽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빨라지는 그만큼 생각을 점점 더 않게 된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세계에 대해 점점 더 피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많이 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대개 시시껄렁한 것 아니면 실용적인 지식이며, 삶의 근원과 관련된 앎은 아니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다. 왜 고통스러운가. 텍스트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생각', 즉 사유思惟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 역시 그렇듯이 이 고통의 과정 없이는 우리는 텍스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기다림을 배우고, 연민을 배우며, 깊은 슬픔을 응시해 낼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의 온갖 존재들이 감추고 있는 아름다움을 읽어 내는 심안心眼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문학과 예술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세상ㆍ삶ㆍ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텍스트'에 대한 탐구다.-.쪽

잠에서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는데, 깨우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잠에 곯아떨어지기도 했다.

=>천하태평이지요... 제 생활이 이래요. ㅋㅋ-.쪽

연암은 '최고의 독서와 최고의 글쓰기는 자연이다'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과 변화, 그 생동감과 생기를 잘 읽어 내어 그것을 글쓰기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연암 문학의 요체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연암의 글은 설사 자연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글조차도 이런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연암은 문학이란 부단히 자연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쪽

연암 외에도 빈사처貧士妻의 생애를 기록한 문인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연암의 이 글처럼 그런 여성의 내면 풍경과 심리 상황까지 냉철하게 그려 보인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은 가난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한 여성이 절망과 낙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 놓고 있다.-.쪽

우리가 기억하는 연암가의 여자들은 공인 이씨 외에도 연암의 큰누이, 연암의 아내 등이 있다. 이 세 여인은 모두 빈사貧士의 처로서, 신산한 삶을 살다 죽었다. 연암의 아내는 1787년 51세로 세상을 떴다. 연암은 친구 유언호의 도움으로 1786년 처음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벼슬을 하나 얻어 하게 된다. 연암의 아내는 연암이 벼슬을 얻은 지 1년 만에 세상을 떴으니 그녀 역시 가난 속에 고생만 실컷 하다 죽었다 할 만하다. 연암은 평소 아내의 인품을 존경했으며, 아내가 죽자 애도하는 시 20수를 지었다. 그리고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연암은 첩도 둔 일이 없다. 재혼도 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은 연암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퍽 이례적인 일이다. 연암의 이런 태도는 이 글이 보여주듯 집안의 여성들을 보면서 연암이 느껴 온 미안한 마음 및 감사하는 마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어찌 생각하면 연암의 형수나 아내와 같은 여인들의 고생 위에 연암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연암을 기뻐하는 자, 이 여인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쪽

연암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취했던 이런 독서법으로는 창조적 글읽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창조적 글읽기가 안 되면 창조적 사고도 나오기 어렵다. 창조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조적인 글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글읽기는 결국 글쓰기의 문제와 직결된다. 연암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의고주의'擬古主義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잘못된 독서법에서 연유하는 면이 없지 않다. 창조적 글읽기가 안 되면 결국 읽은 것을 흉내 내거나 본뜨는 쪽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연암 득의의 창작 방법론인 '법고창신론'은 연암이 주창한 주체적ㆍ심미적 독서법과 상관관계가 없지 않다.
연암의 시대는 그렇다 치고,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창조적ㆍ주체적 독서를 하고 있는가? 혹 연암이 비판한 바로 그 독서법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가? 외국 이론을 산만하고 무비판적으로 읽고서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 한 창조적 사고와 창조적 글쓰기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연암의 독서법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연암은 「본래의 선비」(원제 '원사'原士)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독서하여 곧바로 어디에 써먹으려 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다. 평생토록 글을 읽어도 배움이 진전되지 않는 건 바로 이 사사로운 마음이 해를 끼쳐서다."

이 글에서 연암은 책(혹은 글)이라는 텍스트를 사물이라는 텍스트, 현실이라는 텍스트, 자연이라는 텍스트와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 짓고 있다. 그리하여 연암에게 있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와 현실과 자연을 읽는 행위가 된다. 이처럼 연암에게 있어 텍스트는 책 혹은 글에 한정되지 않고 그 바깥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책 바깥의 텍스트를 환기하는 일이 된다.-.쪽

연암은 글의 거죽만 읽으려 들지 말고 글에 깃들여 있는 글쓴이의 마음을 읽으라고 말하고 있다. 연암의 이 말은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연암이 쓴 글들의 거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거나 환호할 것이 아니라, 그 심부에 깃들여 있는 연암의 마음, 연암의 고심을 읽어 내는 일이 중요하다. 연암의 글을 피상적으로 읽고 망발을 일삼거나 대중을 위한다면서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암의 이 말에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하리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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