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선 기자 =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에르네스토 사바토(1911∼)는 라틴아메리카 작가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삼총사'로 불린다.

물리학 박사 출신인 그는 1947년 유네스코에서 2개월 동안 일한 뒤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터널'(이룸 펴냄)을 구상했다. 이 작품은 알베르 카뮈, 토마스 만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걸작으로 꼽힌다.

"내가 바로 마리아 이리바르네를 죽인 화가 후안 파블로 카스텔이라고만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작품은 이렇게 38세 화가 카스텔이 자신의 연인을 살해한 범죄사건의 범인임을 스스로 밝히면서 시작된다.

소설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단 1명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카스텔의 시각에서 1인칭 시점으로 계속된다.

절대 고속 속에서 누군가와의 소통을 간절히 원했던 카스텔은 자신이 전시회에 출품한 '모성'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 한참 머물러 있던 낯선 여성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카스텔의 그림 속 작은 원경(遠景)을 그녀가 이해하는 것 같아서였다. 작은 창문 너머로 쓸쓸한 해변에서 한 여자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원경은 처절하고 절대적인 고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몇달 간 우울한 상태에서 그녀만 생각하던 카스텔은 우연히 거리에서 이 여성을 보고 만남을 이어간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시각장애인을 남편으로 둔 주부였다.

한달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리아를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 카스텔은 어느날 마리아의 언동이 모두 작위적인 것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고 그녀를 사촌 시동생 헌터의 정부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카스텔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던 마리아와의 소통은 그를 더 깊은 대화 단절과 고독 속으로 가라앉게 했다.

카스텔은 마리아의 침실로 찾아가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고, 그녀의 남편에게 마리아가 헌터의 정부였다고 말하지만 남편은 "바보는 바로 당신이오! 마리아는 나의 정부이기도 하고, 다른 많은 남자들의 정부이기도 하단 말이오"라고 소리친다.

글을 번역한 조구호 배재대 스페인어ㆍ중남미학과 교수는 "단 한 가지 전망밖에 보이지 않는 어둡고 폐쇄된 지하관 '터널'은 카스텔이 세상과 고립된 존재임을 암시한다"며 "고독하고 절망적인 삶을 세상과 화해시켜줄 수 있는 희망의 상징인 마리아를 살해한 것은 구제할 수 없는 고독에 갇혀 버렸다는 공포와 절망감"이라고 말한다.

또한 장기간 독재자들의 횡포에 숨 막히는 순간을 살아가던 아르헨티나 민중의 억압적 상황이 출구 없는 터널에 비유된다고도 설명한다.

사바토는 1983년 아르헨티나의 국가실종자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1976년부터 이어진 혹독한 군부독재 정권의 잔학상을 폭로한 보고서를 제출, 초판 40만 부가 하룻밤 만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작품은 집요한 자기해명을 시도하면서 소외와 고독을 초월한 참다운 공동체 구축을 지향하고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물질이 지배하는 현대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전위예술운동과 좌익운동에도 참가한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초현실주의 화가로도 변신했다.

288쪽. 9천7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