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때가 있다. 꽁꽁 숨겨 두고 싶은 민망한 기억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릴 때. 사람 가득한 전철 안에서, 자기 전에 이빨을 닦다가, 혹은 멍하니 TV를 보며 헤죽헤죽 웃다가 복병 같은 기억을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 瀏?순간은 꼭 평화로운 시간에 찾아온다. 인생의 행복을, 아니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화를 맛보고 있는 순간에 느닷없이, 갑자기, 불현듯. 버스를 올라타다 앞으로 고꾸라진 일이라든가, 함께 길을 걷던 친구인 줄 알고 손을 붙잡으며 말했는데 생판 남이었다든가,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살짝 방귀를 뀌었는데 소리 없이 나올 줄 알았던 가스가 '삐요옹' 새된 소리를 내며 삐져 나왔을 때라든가, 하필 그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그 누군가가 1년 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이라든가. 아무튼 그런 기억은 의외로 굉장히 많다. 행복했던 기억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동감..!!-.쪽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하기는.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진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친구잖아." 친구. 오래 묵어 좋은 사이란 뜻이라는데, 우리가 과연 친구일까? 그냥 그리운 추억의 떡볶이 같은 걸 거야. 재잘대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던 교문 맞은편 분식집에서 팔던 멀건 주황색 밀가루 떡볶이. 그 시절 그 맛은 기억 속에만 아련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찾아가 먹는다 해도 이미 그 때의 떡볶이 맛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때 매일 먹던 떡볶이처럼 그 땐 매일 마주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친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하하 큰 소리로 웃는 우진이 낯설고, 서슴없이 큰 소리로 부르는 우진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영은 더 이상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관계를 잘 유지하기도 힘든 판에, 새로운 친구라니. 거절하고 싶었다. "동창이겠지." 타박타박 계단을 오르며 바라본 하늘엔 별이 아닌 인공위성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반짝이긴 하는구나.-.쪽
"나도 좀 주라. 원두커피는 이상해. 난 정말 그거 돈주고 사 먹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니까. 커피는 쓰고 달고 진해야 제맛인데. 그건 영……." "아까운데." 아깝다고 말하는 진영의 표정이 진심인 듯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진에게 나가라고도 못한 채 엉거주춤 커피 한 잔에 절약정신을 발휘하다니. "내가 다음에 사 줄게. 아니, 우리 회사에서 삥땅칠까? 되게 많더만." "그건 안 돼." 진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오, 착한 척." "그게 아니고, 돈주고 사서 아껴 가면서 마셔야 제일 맛있단 말이야. 많으면 맛없어. 아무 때나 타 먹어도 맛없어. 딱, 일요일 아침에 한 잔. 최고 맛있어. 주말엔 역시 커피 믹스!" 짝짝짝. 진영의 결연한 주장에 우진은 박수를 쳤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는 질끈 하나로 대충 묶은 채 화장실 앞에서 수건을 두르고 펼치는 주장이 그럴 듯해 보였다. "아껴 먹을게. 야, 나 하나 주고 나면, 남은 건 더 맛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런가?" "그럼. 원래 뺏기면 남은 게 더 소중해지는 법이지. 그리고 한 잔 가지고 둘이 나눠 먹어도 얼마나 아깝고 맛있는데. 담배도 원래 돛대가……" "그럼 딱 하나만 타 먹어. 갔다 와서 개수 세어 본다." "어. 딱 하나만. 근데 저거 몇 개 남은 건데?" 슬쩍 떠보는 우진에게 진영은 어림없다는 눈빛으로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다섯 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정말 빼앗아 먹고 싶게 만드는 커피네요.^^-.쪽
"대단해요, 팀장님." "유동준. 동준 씨…… 해 봐요." 사람 참 끈질기긴. 하지만 이번엔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식사 내내 이름 타령할까 봐 겁이 났다. 불쑥불쑥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도 그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 건 타고난 천성일까? 진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유동준 씨." "오빠도 괜찮은데." 동준의 농담에 진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예, 아니오' 대답이 불가능한,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없는 말을 동준이 자꾸 하니 진영은 할 말이 없었다. "이탈리아 음식 좋아해요?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네. 언젠가 꼭 가볼 거예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나랑 같이 갈래요? 나 거기 아는 사람 많은데." "여행은 원래 혼자 하는 거예요. 관광은 같이 가는 거고."-.쪽
이럴 줄 알았다. 진영은 한숨을 삼켰다. 사람들은 다른 일은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면서, 밥 짓는 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선의로 한두 번 도와주면 꼭 너도나도 당연하게 요구하곤 했다. 그러다 나중엔 안 하면 왜 안 하느냐고 닦달까지 했다. 진영이라고 좋아서 하는 요리가 아니었다. 집에선 언제나 언니가 알아서 맛있는 것을 해 주곤 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자취하다 보니 매일 사 먹는 밥에 질려 버렸다. 그래서 하나둘 배우게 됐고, 인스턴트와 건강에 좋지 않은 식품들은 될 수 있으면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새 꽤 그럴 듯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 10년만에 만난 친구들이 너도나도 잡채 얘기를 하다니. 왠지 우진의 탓인 것 같았다. "난 또, 나만 해 주는 줄 알았네." 우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나쁜 이진영. 아무한테나 막 잘해 주고, 아무하고나 데이트하고. 우진은 진영이 빨리 들어가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술잔을 채웠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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