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남녀 - NaVie 009
이유진 지음 / 신영미디어 / 2005년 8월
품절


문득, 그런 때가 있다.
꽁꽁 숨겨 두고 싶은 민망한 기억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릴 때. 사람 가득한 전철 안에서, 자기 전에 이빨을 닦다가, 혹은 멍하니 TV를 보며 헤죽헤죽 웃다가 복병 같은 기억을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 瀏?순간은 꼭 평화로운 시간에 찾아온다. 인생의 행복을, 아니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화를 맛보고 있는 순간에 느닷없이, 갑자기, 불현듯.
버스를 올라타다 앞으로 고꾸라진 일이라든가, 함께 길을 걷던 친구인 줄 알고 손을 붙잡으며 말했는데 생판 남이었다든가,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살짝 방귀를 뀌었는데 소리 없이 나올 줄 알았던 가스가 '삐요옹' 새된 소리를 내며 삐져 나왔을 때라든가, 하필 그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그 누군가가 1년 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이라든가.
아무튼 그런 기억은 의외로 굉장히 많다. 행복했던 기억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동감..!!-.쪽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하기는.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진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친구잖아."
친구. 오래 묵어 좋은 사이란 뜻이라는데, 우리가 과연 친구일까? 그냥 그리운 추억의 떡볶이 같은 걸 거야.
재잘대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던 교문 맞은편 분식집에서 팔던 멀건 주황색 밀가루 떡볶이. 그 시절 그 맛은 기억 속에만 아련하게 존재할 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찾아가 먹는다 해도 이미 그 때의 떡볶이 맛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때 매일 먹던 떡볶이처럼 그 땐 매일 마주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친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하하 큰 소리로 웃는 우진이 낯설고, 서슴없이 큰 소리로 부르는 우진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영은 더 이상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관계를 잘 유지하기도 힘든 판에, 새로운 친구라니. 거절하고 싶었다.
"동창이겠지."
타박타박 계단을 오르며 바라본 하늘엔 별이 아닌 인공위성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반짝이긴 하는구나.-.쪽

"나도 좀 주라. 원두커피는 이상해. 난 정말 그거 돈주고 사 먹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니까. 커피는 쓰고 달고 진해야 제맛인데. 그건 영……."
"아까운데."
아깝다고 말하는 진영의 표정이 진심인 듯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진에게 나가라고도 못한 채 엉거주춤 커피 한 잔에 절약정신을 발휘하다니.
"내가 다음에 사 줄게. 아니, 우리 회사에서 삥땅칠까? 되게 많더만."
"그건 안 돼."
진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오, 착한 척."
"그게 아니고, 돈주고 사서 아껴 가면서 마셔야 제일 맛있단 말이야. 많으면 맛없어. 아무 때나 타 먹어도 맛없어. 딱, 일요일 아침에 한 잔. 최고 맛있어. 주말엔 역시 커피 믹스!"
짝짝짝. 진영의 결연한 주장에 우진은 박수를 쳤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는 질끈 하나로 대충 묶은 채 화장실 앞에서 수건을 두르고 펼치는 주장이 그럴 듯해 보였다.
"아껴 먹을게. 야, 나 하나 주고 나면, 남은 건 더 맛있을 거 아냐. 안 그래?"
"……그런가?"
"그럼. 원래 뺏기면 남은 게 더 소중해지는 법이지. 그리고 한 잔 가지고 둘이 나눠 먹어도 얼마나 아깝고 맛있는데. 담배도 원래 돛대가……"
"그럼 딱 하나만 타 먹어. 갔다 와서 개수 세어 본다."
"어. 딱 하나만. 근데 저거 몇 개 남은 건데?"
슬쩍 떠보는 우진에게 진영은 어림없다는 눈빛으로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다섯 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정말 빼앗아 먹고 싶게 만드는 커피네요.^^-.쪽

"대단해요, 팀장님."
"유동준. 동준 씨…… 해 봐요."
사람 참 끈질기긴. 하지만 이번엔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식사 내내 이름 타령할까 봐 겁이 났다. 불쑥불쑥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도 그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 건 타고난 천성일까? 진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유동준 씨."
"오빠도 괜찮은데."
동준의 농담에 진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예, 아니오' 대답이 불가능한,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없는 말을 동준이 자꾸 하니 진영은 할 말이 없었다.
"이탈리아 음식 좋아해요?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네. 언젠가 꼭 가볼 거예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나랑 같이 갈래요? 나 거기 아는 사람 많은데."
"여행은 원래 혼자 하는 거예요. 관광은 같이 가는 거고."-.쪽

이럴 줄 알았다. 진영은 한숨을 삼켰다. 사람들은 다른 일은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면서, 밥 짓는 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선의로 한두 번 도와주면 꼭 너도나도 당연하게 요구하곤 했다. 그러다 나중엔 안 하면 왜 안 하느냐고 닦달까지 했다.
진영이라고 좋아서 하는 요리가 아니었다. 집에선 언제나 언니가 알아서 맛있는 것을 해 주곤 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자취하다 보니 매일 사 먹는 밥에 질려 버렸다. 그래서 하나둘 배우게 됐고, 인스턴트와 건강에 좋지 않은 식품들은 될 수 있으면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새 꽤 그럴 듯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 10년만에 만난 친구들이 너도나도 잡채 얘기를 하다니. 왠지 우진의 탓인 것 같았다.
"난 또, 나만 해 주는 줄 알았네."
우진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나쁜 이진영. 아무한테나 막 잘해 주고, 아무하고나 데이트하고. 우진은 진영이 빨리 들어가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술잔을 채웠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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