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전쟁
제성욱 지음 / 팬덤 / 2006년 5월
품절


"정 기자님에게 다 들었어요. 선배님은 우리 신문사 공채 42기라면서요?"
"난 신문사를 그만둔 지 오래되었소."
"예전에 정 기자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요. 촉망받는 기자였다면서요? 미국에 언론연수를 다녀오고, 워싱턴 특파원 생활도 1년 정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신 거죠?"
"결국 그 질문을 또 하는군."
"저도 기자니까 궁금할 수밖에 없죠."
맥주잔을 든 최 형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맥주 한 잔을 온전히 비우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들고 있는 펜이 어느 순간 칼로 보이더군요. 칼은 아주 쓸모가 많은 물건이죠. 칼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도 솜씨를 발휘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강도의 손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흉기로 돌변하고 맙니다."
"기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기자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난 기자라면 현실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죠."
"기자로서 한계를 느끼셨다는 말씀이세요?"
최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쪽

"미국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는 동안 객관적인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신문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정된 지면에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선택의 과정에서 주관과 편견이 개입되는 거죠. 기자 또한 자신의 가치관과 틀이 있기 때문에 취재 단계부터 주관이 개입되고 마는 겁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진 국제 역학관계는 더욱더 그 진실을 묻어버리고 말죠. 힘의 우위에 따라 사실이 왜곡되고 뒤틀린다는 말이오."-.쪽

"그렇게 따진다면 절대로 기사를 쓸 수가 없지 않아요? 현실에 존재하는 왜곡을 최대한 줄이려는 자세와 노력이 중요하죠."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항상 신중을 기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문사의 시스템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면 무슨 수가 있는 거죠?"
"우리 신문사의 편집 시스템이 왜곡되었다는 말씀이세요?"
최 형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전 우리 신문사가 공정하고 뒤틀림 없이 객관적인 보도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 제기성 기사도 가장 많이 써내고 있는 곳이에요."
(중략)
"그래서 잘나가던 워싱턴 특파원을 그만두고 경찰직을 택하신 거군요."
최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홍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따지면 경찰도 철저한 조직 사회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기자를 그만두고 경찰을 선택하셨어요?"
"진실 추구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겠죠.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수사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것, 다시 말해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경찰도 수사할 때 조직으로 움직이죠. 하지만 개인의 판단과 감각에 맡기는 경우가 더 많아요. 수사한 내용을 위에서 조작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고요."-.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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