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진영 기자]
 
▲ <일상 속의 깨달음> 겉표지.
ⓒ2006 도서출판 황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자 모두들 말없이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쌌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나는 그 시신이 아버지가 아닌 생명 없는 껍데기임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를 본 나는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밖에 설명할 수 없고 잘못 생각했던 인생의 신비를 어렴풋이 엿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어린 시절은 끝났다. 더 이상 세상은 낙원이 아니었다. 어린 날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대신 고통이 자리잡았다. 인생은 불행의 용광로 같았다.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15쪽)


맑은 아쿠아 블루빛 눈에 가사 장삼을 걸친 표지 사진이 인상적이다. 벽안의 남자 수도자는 몇 권의 베스트셀러로 이미 만났지만, 적어도 필자에게 푸른 눈의 비구니는 낯선 이방인이다.

<일상속의 깨달음>은 호주에서 태어난 예셰 초드론 스님이 자신의 수행록과 함께 불교의 기본 교리를 일상 언어로 정리한 책이다.

예쁜 옷과 남자친구, 성적표, 유치한 공상 등에 빠져 지내던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던 10대 소녀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분노로 가득 차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위축되고 절망에 빠진 동물로 바뀌었다'고 회상하며 티베트 비구니가 된 사연과 과정을 이야기한다.

초드론 스님의 좌절과 불안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소녀는 삶의 허무를 목도하고, 지독한 상실감으로 자살까지 시도한다. 그녀는 열다섯 나이에 머리를 깎은 뒤,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다 2년 후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난다.

깨달음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조언서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에 관심을 두게 된 사람들은 흔히 히말라야나 인도의 뿌나를 동경한다. '지금-여기'에서 당장 집착과 번민의 고리를 끊는 것은 많은 용기와 실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 눅눅해진 사람들에게 '지금-여기'에서의 각성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질 뿐이다.

머리도 깎아보고, 면벽도 해보고, 순간순간 자신의 상태를 주시해 보기도 하던 사람들이 뿌나에 가거나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셰 초드론 역시 그런 여행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깨달음을 원하게 된 동기를 밝히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 불교에 대해 공부한 내용과 수행 과정을 착실하게 정리해 두었다. 불교에 관심이 있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불교 이론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 체득했는지 여부에 대해 '알다가도 모르겠는' 경험을 한번쯤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약간의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깨달음에 대해 눈을 뜨는 단계부터 불교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일상, 진실한 동정심과 보리심을 지니게 되면 자연스레 누릴 수 있는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믿기 어려운 거창한 설법 대신 일상의 삶에 근거한 영적 수행에 관해 차근차근 읽을 수 있도록 썼기 때문에 다양한 수준의 독자를 껴안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초드론 스님은 설거지를 하거나 산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몸과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정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라고 권한다. 말로는 쉽지만, 사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 소녀가 경험한 십여 년의 수행록이 짧지 않은 까닭은 책의 앞부분 3장 이후 부분에서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서적이나 불교 이론에 관한 책을 자주 접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수행록으로 느껴져 실망감을 안겨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범한 수행기가 줄 수 있는 장점을 고려한다면, 불교식 수행과 깨달음에 관심을 두게 된 초심자나 견성해 보겠다고 머리 깎고 다람살라 근처를 굶주린 개처럼 헤매본 사람들, 또 이미 자신이 어느 정도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깨달음의 급수 놀이에 맛들인 '깨달음병 환자들' 모두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구절들을 선사해 줄 것 같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서양인을 향한 포교용 책자'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불교의 다양한 면을 읽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읽기 쉽다고 이해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머리로 이해하기 쉽다고 온몸으로 실천하기 쉬운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어딘가로 탈출하고 싶어질 때마다 한 젊은 여성의 정신 여행기인 이 책을 곁에 두고 틈나는 대로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정진영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