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저는 한때 사람은 자신의 성격과 욕망에 따라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과 물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구요. 가끔 우리는 아이스크림과 담배를 고르듯이 어떤 사랑을 해봤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사랑이 불시에 찾아드는 게 아닐까요. 살면서 내가 만나는 연인들은 나에게서 각기 다른 것들을 끌어내줍니다. 열정, 질투, 관능, 관용, 야만, 꿈. 당연히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의 은유들로 무성한 시적인 사랑, 하나의 종교 같은 헌신적인 사랑, 너와 내가 잘 구분되지 않는 편안한 사랑, 야만적이도록 탐욕스러운 사랑. 상대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사랑이 있었던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내가 결국 한 타입의 사람과 오래 연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결혼한 사람은 부모와 첫 연인의 변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생존의 본능은 모험보다는 익숙함을 선호합니다. 사랑은 이토록 이상하고 생생한 모순 덩어리입니다. 저는 이십 년을 가슴에 품고도 한순간에 유리처럼 깨져버리는 사랑도 서로의 바닥을 들여다보고도 끝나지 않는, 낡은 가죽처럼 질긴 사랑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은 완벽한 것, 불변의 것,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사랑의 색깔과 함량을 알아볼까요? -.쪽
저는 한때 사랑에서 가장 정밀한 필터 노릇을 하는 건 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분들은 몸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정직한 것도 아니라고 반박하시겠지요. 제가 몸은 자신이 끝까지 친밀해도 좋을 사람을 마음보다 먼저 알아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면, 그 분들은 몸의 욕망이 오히려 사랑을 망가뜨린다고 반박하실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랑들과 각 사랑의 무늬들에 대한 탐색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과장되고 때론 편견의 대상이 되고 온갖 무성한 소문들의 출처가 되는 '몸'의 복원 작업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욕망을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면 존재하는 건 날것의 욕망과 사랑에 감싸인 욕망뿐이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고, 욕망을 자신의 도구로 부리는 사랑과 욕망조차 잠재우는 사랑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그 모순을 이 소설에서 탐사해보고 싶습니다.-.쪽
혹시 <잉글리쉬 페이션트>라는 영화 봤소?" "그거 오래된 영화 아닌가요? 스물두세 살쯤인가, 볼까 하다 못 봤는데." "안 봐도 돼요, 걸작은 아니니까. 원작은 걸작이라는데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는 그쪽 영화답게 버터 칠이 꽤 돼 있지. 그래도 볼 만한 구석은 있어요. 팔 년 전쯤 극장에서 봤던 영화를 최근에 비디오로 다시 봤어요. 나중에 영국인 환자로 불리게 될 한 남자가 학회 동료의 아내를 사랑하고, 통정을 하다 그녀의 남편이 알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남편도 죽고 여자도 죽고, 주인공인 그 역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전신에 화상을 입지. 사실 뻔한 불륜 스토리인데도 가슴을 치는 게 있어요. 바로 남자가 입은 치명적인 화상이요. 아, 물론 제작자도 그걸 알고 있었겠지." "……." "운명이란…… 결과요." (중략) "내 말은 결과가 훨씬 위압적이라는 뜻이오. 영국인 환자는 전신에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여자를, 여자만을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소. 게다가 그는 죽어가고 있지. 만약 그가 온전하다면 언젠가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 않겠소?"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렇게도 해석할수 있군요..-.쪽
"……누가 오는데요? 여자?" "그래. 나와 상관없는 여자. 남자에겐 두 부류의 여자가 있어. 어릴 땐 예쁜 여자와 덜 예쁜 여자. 나이가 들면 내 인생과 상관있는 여자와 상관없는 여자." "중간에 또 있겠지. 섹시한 여자와 별로 섹시하지 않은 여자."-.쪽
"오빠는 어때요? 결혼 생활은 좋아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단지 좀 지겨울 뿐이지." "……." "일단 시간의 문제지. 보통 오 년쯤 되면 서서히 균열이 간다고 해. 신혼은 지나갔지, 애 낳아 키우는 전쟁 같은 시기도 넘겼지, 섹스는 매일 똑같은 반찬을 먹는 것처럼 지겹지. 아파트 단지의 젊은 남자들이 슬슬 밖으로 돌기 시작하지. 처음엔 단지 안의 호프집, 다음엔 동네 건물 지하의 재즈바, 그 다음엔 더 멀리…… 서서히 비밀스런 연애가 시작되고. 뭐, 그렇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는데도 그렇게 되나요? 불과 오 년 만에?" "글쎄,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남자도 있고 일상을 같이하기에 가장 편한 사람과 결혼한 남자도 있겠지." "오빠는 어느 쪽이에요?" "난 단지 그때 결혼해버리는 쪽이 훨씬 편했어. 늦게 학교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모두 고달픈 데다 자취도 하숙도 하기 싫었거든." "오빠도 '누구의 인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남자'에 속하죠?" "그래도 난 거짓말은 안 했다. 프러포즈를 할 때도 솔직하게 말했어. 너를 위해 살겠다고 말은 못한다. 어쩌면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 어느 순간도 함께 산다는 걸 잊진 않겠다." "……." "……." "그러니까 부인이 뭐래요?"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된대." 은재는 소파에 등을 묻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랑 비슷한 여자가 또 있네요. 아, 아니지. 나보다 오빨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난 누구에게도 당신 곁에 있는 것만으로 돼요, 라곤 말 못하니까."-.쪽
결국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즉 사랑과 소유의 문제다. 사랑을 가장 쉽게 소유하는 형태는 결혼이다. 비록 언젠가 그것의 틀 속에서 사랑이 질식하게 될지라도.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연인들은 결국 헤어진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재는 달랐다. 그녀는 정연을 소유하지 않아도 계속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장점이 많을 수도 있다고 애써 자위했다. 돈에도 악습일 수 있는 관습에도 죽음을 거들어줘야 하는 의무에도 매이지 않고 그 사람의 보다 근사한 부분들, 즉 에센스만을 사랑하는 것.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자신이 없어진다. 요즘은 균형을 잡는 일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그녀 역시 별 수 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미친 짓들을 하게 될까-.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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