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이한수기자]

‘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여지학문 출어시서 이성어역시서·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

1983년 ‘삼국유사(三國遺事)’ 원본 영인본을 산 첫 날 그는 맨 앞장에 호기롭게 썼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배우던 대학 4학년생이었다. 주문(呪文)의 힘이었을까? 그 후로 20여년간 고운기(45)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삼국유사’ 한 우물만 팠다. 최근 출간한 ‘길 위의 삼국유사’(미래M&B)는 그가 쓴 ‘삼국유사’ 관련 네 번째 책이다.

기존 세 권의 책이 연구·교양서였다면 이 책은 일연(一然)과 삼국유사의 자취를 찾아 쓴 기행문이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려 도착했다는 영광 법성포(法聖浦)부터 열네 살 소년 일연이 출가한 양양 진전사(陳田寺)까지 열 다섯 곳을 4년간 순례했다.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그는 책 곳곳에 직접 쓴 시도 덧붙였다. 사진은 작가 양진(40)씨가 찍었다.

“현장을 찾아서 공간의 배치를 눈으로 확인하면 이야기의 뒷면이 보입니다. 삼국유사란 책이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성(reality)이 있는 것임을 느끼는 열쇠가 되는 셈이죠.”

그의 눈에 걸리면 고을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불교가 처음 들어온 곳이 ‘영광(靈光)’이며 ‘법성(法聖)’인 것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영광에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불교의 첫 절’이란 뜻이다. 그는 무녕왕릉에서 선화공주를 떠올리고 분황사 석벽에선 원효와 설총의 뒷모습을 읽는다. 설화(說話)의 현장에서 ‘사실’(fact)을 낚아 올리는 솜씨가 대단하다.

“양양 진전사는 일연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입니다. 그 곳에 가보니 동해바다와 낙산사(洛山寺)가 한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아, 그때 알았습니다. 일연은 이웃한 낙산사에 놀러 다니면서 의상과 원효대사 이야기, (세상이 헛됨을 깨달은) 조신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삼국유사에 쓴 것이죠.”



오는 7월 6일은 일연이 태어난 지 딱 800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이를 기념해 일연의 일대기를 담은 ‘일연을 묻는다’(현암사)라는 책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그에 따르면 일연은 거창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삼국유사’를 쓴 게 아니라 백성들이 불교경전을 쉽게 이해하도록 우리 이야기 속에서 예화(例話)를 찾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 애틋하고 소중하다.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연오랑 세오녀’는 바다에 빠져 안타깝게 죽은 젊은 부부 이야기가 발전된 것입니다. 이건 우리 무속(巫俗)을 공부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앞으로 불교경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려고 하는데 아마 그 때 삼국유사는 또 새롭게 보일 겁니다. 아직 저는 10%도 못했어요.”

“삼국유사를 20년 연구하고도 더 공부할 게 남아 있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답한 말이다.

(이한수기자 hs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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