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철학자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철학의 역사
마르트 룰만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05년 5월
품절


테아노, 다모, 미야, 티미카, 핀티스, 페릭티오네
(기원전 5세기경 피타고라스주의 여성 철학자들)

피타고라스주의 여성 철학자들은 대단히 똑똑하고 교양도 갖춘 여성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습화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순종형의 가정주부들'이었다. -.쪽

밀레토스 출신의 아스파시아
(기원전 460년경~401년경)

자료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아스파시아와 아주 빈번하게 철학적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인식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즉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도 아스파시아의 정신적인 교류를 갖는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아돌프 슈미트는 그의 저서 <페리클레스와 그의 시대> 1권(1877년,100쪽)에서 "소크라테스는 특히 아스파시아와의 정신적인 교섭 과정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철학자로 성장했다."고 쓰고 있다. 나아가서 슈미트는 우리가 "소크라테스식의 철학하는 방법"이라고 알고 이쓴 것은 모두 다 어저면 "실은 아스파시아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에 제자로서 아스파시아에게 철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런 내용이 점차 철학사에도 반영되기를 기대해 본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그에게 영향을 준 아스파시아에 대해서는 지금에야 알게 되었네요-.쪽

만티네이아 출신의 디오티마
(기원전 430년경)

디오티마는 우선 에로스를 하나의 데몬(Demon)으로 묘사하는 데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데몬은 생멸과 불멸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과 신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 신들은 에로스를 통해 인간들이 진선미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따라서 여기서 에로스란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이며 진리는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에로스의 철학적 본질에 관한 결정적인 진술이다.
디오티마는 여기서 다시 한번 육체적 생식과 정신적 생식을 명확하게 구별짓고 있다. "생식욕으로 사랑을 하게되면 여성을 향하게 되고... 이리하여 여성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명을 빚어낸다." 이에 반해 디오티마는 정신적 생식력을 가진 사람들, 즉 시인, 예술가, 특히 정치인과 철학자들을 훨씬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만 "아름다움의 인식에 이르는 계단"이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쪽

히파르키아
(기원전 360~280년)


여성 철학자 히파르키아(Hipparchia)는 견유학파 소속이다. 이 학파의 창설자는 안티스테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안티스테네스는 의식적으로 추상적 인식을 배제했다. 그는, 철학적 앎은 삶을 편안하게 하여 인간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목적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은 사람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인간은 욕망으로 인해 늘 사회의 규범과 강요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견유학파의 냉소주의는 무욕론(無慾論)을 주창했다. 가장 유명한 견유학파 철학자는 크세노파네스를 따라 거지의 삶을 살았던 '통 속의 디오게네스'였다.
견유학파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의 독립성과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세계 시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공개적으로 도발적인 행태들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오늘날의 냉소주의(Zynismus)란 개념도 이 학파(Kyniker)에서 유래한 것이다.

히파르키아는 트라키아에 있는 마로네이아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오빠 메트로클레스를 통해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를 알게 되었다. 히파르키아는 크라테스의 학설과 삶의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그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만일 자신이 크라테스의 부인이 될 수 없다면 자살하겠다고 부모를 협박했다. 그의 부모는 이 철학자에게 자신의 딸이 그런 생각을 버리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스스로 멋진 남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같은 무욕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리하여 크라테스는 옷을 완전히 벗고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둔 채 히파르키아 앞에 서서 말했다. "여기에 당신의 신랑이 있소. 이게 당신 재산의 전부가 될 것이오. 당신의 결정만 남았소."
히파르키아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가난한 공동 유랑 생활에 동참했다.-.쪽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서기 370~415년경)

370년경에 태어난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인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이었던 무세이온에서 400년경부터 철학,수학,천문학을 강의했다. 415년 부활절 직전에 그는 광신적인 기독교 무리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범죄의 정치적 배우, 예를 들어 키릴의 역할 같은 것은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히파티아의 죽음이 로마 제국이 최종적으로 기독교화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고대 그리스의 학문들과 소위 '이교적인'철학의 종언을 의미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무엇보다 자연과학과 수학에서 엄청난 퇴보를 가져왔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훗날 마녀사냥에서 살기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여성 증오가 초래한 최초의 피의 희생이기도 하다. 히파티아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십만 여성들의 원혼을 대변한다. 바로 그 때문에 히파티아라는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다."-.쪽

빙겐의 힐데가르트
(1098~1179년)

독일 신비주의의 창시자 빙겐의 힐데가르트는 수도원장이자 과학자이?작고가로써 많은 작업들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철학의 역사는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분야의 교과서나 사전들은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여성 철학자로서 힐데가르트가 기여한 점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다양한 우주론적 생각들", 특히 피타고라스의 고대적 사유를 12세기에 끌어들인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덕성론에서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연약하다'고 특징지으면서 동시에 여성은 감수성이 뛰어나고 민감하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그가 '강하다는 것'을 증정적인 속성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구약성서>는 강함으로 인해 미완성에 이른 것으로, <신약성서>는 연약함으로 인해 완성에 이른 것으로"비교하고 있는 데서도 간접적이지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쪽

크리스틴 드 피장
(1365~1430년)

프랑스 최초의 직업적인 여성작가이자 중세의 가장 중요한 여성상.
그의 포괄적인 작업은 타고난 작가로서의 야심으로 인해 일찍부터 그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남성화"에 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준다. 그가 첫번째 전업 여성 작가로서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에서 일궈낸 성취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존경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아직도 반페미니즘적인 편견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서정시인 프랑수아 비용과 비교할 때 그의 지명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오늘날까지 단지 두권의 책만이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뿐이다.-.쪽

메리 아스텔
(1666~1731년)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여성 운동의 개척자.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할 때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인식 능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나라는 인간의 자기규정성'(데카르트)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동물을 궁극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이성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은 그것의 지속적인 사용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을 거의 혹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이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아스텔, 1697년, 19쪽)
아스텔은 이원론자의 입장에서 잠재력을 하나의 고차원적인 정신적 실존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반대의 입장에서 그것을 질투심, 사욕(私慾), 그 밖의 좋지 않은 각종 습관을 포괄하는 인간 존재의 물질주의적이고 저차원적인 측면들로 보았다. 그가 볼 때 우리가 이성적인 삶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독립적인 전제로 교양(혹은 교육)을 갖춰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 성찰적이고 이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실존을 …… 방해하는 물질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삶의 모습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쪽

여기서 자연스럽게 여성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그의 요구가 나온다(페퍼-스미스, 1989년, 230쪽 참조). 물론 아스텔 이전에도 이미 많은 여성들이 이 같은 목표를 위해 싸웠다. 그렇지만 그는 여자 대학 설립을 제안하여 아스파시아 이후 처음으로 여성 고등 교육기관의 제도화 문제를 들고 나온 셈이 되었다. 그에게 여성이 높은 수준의 교양을 갖추는 것은 동시에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결혼의 이상, 즉 이성적인 부부 관계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스텔은 여전히 인습적이다. 그러나 당시의 결혼 제도에 대해 그는 대단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의도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연구서인 ≪결혼에 관한 고찰≫(1700년)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메리 아스텔은 평생 동안 일체의 감각적인 자극들을 억제하려고 무진 노력했다. 그는 규칙적으로 명상과 단식을 했다. 정신이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가 섹스를 멀리한 것도 이러한 합리주의적인 근본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쪽

에밀리 샤틀레 후작부인
(1706~1749년)

그는 스물여덟 살때 볼테를 알게 된 후 죽을때까지 14년 동안 교분을 유지했다.
그는 볼테르와 공동으로 <뉴턴 철학의 기본 요소들>을 집필했다. 그런데 이 책은 볼테르 자신이 명확하게 공저라고 입장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볼테르의 단독 저작으로 간주되어왔다.

=>씁쓸한 역사네요.-.쪽

루 안드레아스 잘로메
(1861~1937년)

루 안드레아스-잘로메는 자유를 그런데다가 주지 않았다! 이 글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이미 어려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삶의 현실성을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외적인 자유와 내면의 자유, 모든 것에 대한 개방성, 그 무엇과 그 누구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겟다는 의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지속적인 이행, 좋은 의미에서의 방심 등을 알고 있던 한 여성의 절규, 그것은 한마디로 삶의 진정성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단 하나의 완결된 철학 작품도 남기지 않고 사상들을 모두 연소시켰다. 그가 가진 강박증은 인식한 것들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인식 그 자체였다.
그는 생전에 이미 유명한 여성 작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그와 가깝게 지냈던 니체, 릴케, 베데킨트, 프로이트 등과 연결을 지어서 생각한다. 그리고 니체와 또 다른 남자 친구인 철학자 파울 레의 뒤에 있는 마차 위에서 채찍을 들고 있는 잘로메의 사진은 지금도 유명하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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