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철학자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철학의 역사
마르트 룰만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05년 5월
품절


여성에게도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철학하는 남성들-여기에는 소크라테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에라스무스, 존 스튜어트 밀 등과 같은 소수의 예외가 있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들은 집요하리만큼 철두철미하게 정신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 감각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라는 등식을 고집한다.-.쪽

페미니즘적 철학함의 목표는 처음부터 이처럼 철학적 성찰의 공간에서 여성들을 이중적으로 배제하려는 기도를 까발리고 그런 배제가 갖는 의미를 인식론적 차원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늘 '곁다리처럼 취급되던' 여성적인 것을 담론의 객체에서 주체로 전환 시키고자 할 뿐만 아니라 남성 일변도의 철학이 주장하는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한다.-.쪽

철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철학사에서 아스파시아가 갖는 의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은 바로 아스파시아의 발명품이다.-.쪽

여성의 (무)능력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백년 동안 진행되어왔으며, 중세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여성은 과연 인간인가 아닌가'하는 것이 근저에 깔려 있는 문제 제기엿다. 이런 문제 제기의 중심에는 하느님은 '남성'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생겨난, 남성은 '하느님을 꼭 빼닮았을 것'이라는 인류학적 견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동시에 여성은 그에 상응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열등하며, 따라서 결코 인간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입증 근거'가 되었다.

=>'여성이 인간인가?'라는 주제는 지금 생각하면 우습겠지만, 고대 그리스에 여성과 노예가 선거권도 없고 글도 쓸수 없었던 시대를 생각하면 결코 우스운 일은 아닐것이네요.-.쪽

소녀들을 위해 고대에 존재했던 유일한 교육 공간이라면 기녀(혹은 기생) 양성 학교가 전부였다. 따라서 이런 직업 세계에서 많은 여성 철학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이스, 라스테니아, 레온티온). 그 밖에 여성 교육의 유일한 대안은 교육받은 아버지나 남편들에게서 직접 배우는 것이었다(테아노, 다모, 아레테, 히파르키아, 히파티아). 그래서 여성 철학자 아스파시아는 소년들의 학교를 상응하는, 소녀들의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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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그리스 사상가보다 학문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이 두 사람보다 훨씬 결정적이었다. 그에게 여성이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발생학'에 관한 논문에서 보이듯 '여성적인 피조물'은 생물학적인 결여체이자 '훼손된 남성'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남성의 종자만이 하나의 영혼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종종 위대한 사람들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지요...-.쪽

자연현상에 대한 철학자 탈레스의 관심은 모든 철학의 출발점에서 '경이감', 즉 스스로 직접 의미를 제시하는 현상들에 대한 놀라움이 놓여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뒷받침해준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수학자이면서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사물의 변화, 예를 들어 사물들이 계속해서 변하거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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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철학은 곧 '지혜에 대한 사랑'(그리스어로 'philia'는 우정, 사랑, 'sophia'는 지혜)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정의는 더 이상 적실함을 갖지 못한다.
원래 '소피아'라는 그리스 말로 모든 종류의 지식과 교양,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의 능함과 뛰어남을 의미했다. 철학의 관심은 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능력 너머에 있는 영역들을 향해 있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물에 정통해야 한다."고 철학자 헤라클레이스토스 주장했다.-.쪽

교양은 매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귀족 집안에서는 그것을 체면 유지나 사교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여성들이 그 수준을 넘어서 학문을 응용하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다. 남성들이 하는 지도자의 역할에 여성이 뛰어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들이 교양을 습득하는 일은 결혼할 때까지만 가능했고, 그 후에는 과부가 되어야만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결혼을 최대한 늦추었다.-.쪽

계몽주의

1783년 이마누엘 칸트는 어느새 하나의 고전처럼 되어버린 '계몽주의'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숙함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이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는 것이라면 미숙함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당신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겠다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표어이다."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은 휴머니즘의 철학이었다. 인간은 처음으로 세계 시민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교양을 통해 좀더 고귀해지려고 노력했다. 계몽주의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독단론이나 선입견, 미신 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들은 '합리적 근거를 갖는 신앙'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운동의 중심 개념은 관용이다.-.쪽

합리주의와 감각주의의 관계

두 가지 인식론적 사고가 계몽주의 철학을 지배했다. 합리주의의 안내자는 독일과 프랑스에 있었다. 여기에는 르네 데카르트, 바루흐(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크리스티안 볼프 등이 속한다. 그들에게 모든 인식의 제1의 원천은 이성이다. "18세기에는 이성의 단일성과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관통한다. 이성은 모든 사유하는 주체, 모든 민족과 국가, 모든 시대, 모든 문명에 똑같은 것이다."(카시러, 1973년, 5쪽)
이것이 여성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컸다. 여성들이 이성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배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여성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면 메리 아스텔과 앤 콘웨이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철학 논쟁이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ㆍ기계론적 세계상에 관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활동했다.-.쪽

19세기 말의 상황은 여성들에게 진보를 고취할 만한 아무런 동기도 부여하지 않았다. 왕정복고 시대(1850~1890년)가 열리면서 오히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능력을 갖는다고 했던 초기 계몽주의의 사상은 한쪽으로 밀리고 전통적인 여성상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비록 미미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1865년 라이프치히에서는 전(全)독일여성연맹(ADF)이 탄생했다. 이로써 1848년에 좌절된 혁명 이후 처음으로 독일에서 여성 운동이 생겨났다. 이 단체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아우구스테 슈미트, 헨리에테 골트슈미트, 그리고 30년 동안 이 연맹의 의장을 지낸 루이스 오토 페터스였다. 페터스는 1866년에 여성이 직업을 가질 권리를 주창하는 글을 펴낸 적이 있는데, 그 권리는 여성연맹의 주된 관심사였고, 그것의 쟁취를 위해 상당히 오랜 기간 연맹에서 활동했다(헤트비히 벤더, 레노레 퀸 참조).
바로 같은 해에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해리엇 테일러-밀 참조)이 하원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주창했지만 이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주제는 이제 더 이상 공적인 토론의 장에서 배제되지 않았다.-.쪽

교육 분야에서도 최초의 서광이 비쳤다. 독일어권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취리히 대학이 1865년 겨울 학기에 여성들의 수업 참여를 허용했다. 1867년 12월에는 같은 대학에서 나데슈다 수슬로바가 처음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달리 프로이센의 대학에서 여성들의 정규 입학이 허용된 것은 1908년에 와서이다. 따라서 이 무렵 취리히가 학문을 하고 싶은 여성들, 특히 동구권 여성들의 메카가 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 중에는 안나 투마르킨(Anna Tumarkin), 루 안드레아스-잘로메, 레사 폰 시른호퍼(Resa von Schirnhofer), 헬레네 폰 드루스코비츠가 있다.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여성 운동의 주된 주제는 평등하게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1888년 헤트비히 케틀러는 바이마르에서 여성들의 대학 입학 허가를 요구하는 여성 단체인 '개혁'을 설립했다. 그 결과 1889년 이후 베를린에서는 헬레네 랑어에 의해 3년짜리 실업 과정이 생겨났고, 1893년에는 그것이 인문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훗날 바로 이 학교에서 레노레 퀸과 헤트비히 콘라트-마르티우스도 대학 입학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독일의 첫 번째 여자고등학교는 1893년 카를스루에에 설립되었지만, 시작부터 법적인 권리를 둘러싼 각종 문제들 때문에 투쟁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 학교가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시험) 자격을 갖는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여성들은 대학에서 공부할 권리를 위해 2천 년이 넘도록 투쟁을 해야 했던 것이다.-.쪽

196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여성 운동을 배경으로 이제 여성 철학자들도 자신의 학문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페미니즘적인 철학함의 중요 관심사는 여성들이 철학적인 성찰로부터 이중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늘 논의의 대상에 머물러 있는 여성적인 것이 주체로 바뀌어야 함(바이스하우프트)은 물론, 고대 이후부터 역사에서 여성 철학자들이 사실상 배제되어온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한다.
페미니즘 철학의 이 같은 목표 설정은 여성 철학자들이나 여성적인 주제의 추가라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철학과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인 가치와 규범들에 대한 비판을 지향한다. 페미니즘 철학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곧 여성 해방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나글-도케칼, 1990년, 11쪽). 이런 식의 성찰이 당파적이라는 비난에 맞서 엘리자베트 리스트는 이렇게 반박한다. "보편주의적인 수사학의 도움을 받은 전통적인 이론은 언제나 당파성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론이 무엇보다도 그것의 희생자였던 여성들을 비난하고 있다."(리스트, 1989년, 7쪽) 이론의 전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쪽

이제는 대서양 양쪽의 학문 분야에서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93년 캐럴 C. 굴드가 미국 애틀랜타에서 미국철학협회를 위해 조직한 심포지엄들 가운데 하나의 모토가 '20년 후의 페미니즘 철학'이었다(굴드, 1994년 참조).
굴드는 같은 제목의 발표 논문에서 페미니즘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철학은 페미니즘 덕택에 상당한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굴드, 1994년, 183쪽 참조). 이런 주장을 독일의 대학에서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독일의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페미니즘적인 철학함이 설자리는 거의 없다. 철학과는 통계적으로 정신과학 분야에서 꼴찌 수준이다. 여성 교수의 비율은 여전히 2퍼센트 수준(미국은 13퍼센트)이며, 젠더/여성 연구가 일반화된 미국과 비교해보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월드컵으로 독일이 관심이 가는데, 철학으로 더 눈길을 끌게 되네요.-.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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