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박해현기자]

삶에 대한 웅숭 깊은 시선과 곰삭은 문장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가 이혜경<사진>이 세 번째 소설집 ‘틈새’를 냈다. 오늘의 작가상, 한국일보 문학상, 현대문학상, 독일 리베라투르상을 받은 작가에게 올해 제13회 이수 문학상까지 안겨준 단편 ‘피아간’(彼我間)을 비롯해 9편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피아간’은 여러 차례 유산 끝에 힘들게 아이를 갖게된 임산부가 친정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상황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태아와 망자를 통해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발상이 얼핏 뻔해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사유는 확장된다. 삶과 죽음에 이어 나와 너, 혈연과 외간, 사랑과 이기심, 진실과 거짓 등등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무수한 이분법의 울타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그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옷 아래로 덩두렷이 부푼배가 생명을 담고 오는 배(船)가 아니라 거짓말로 쌓아올린 봉분이라는 생각에 주루륵 눈물을 흘렸다’는 주인공 경은은 거짓 임산부다. 입양할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에게 임신했다고 속이고 연기를 벌인다. 이 소설의 밑바탕에는 자녀 입양과 순혈주의의 대립이 깔려 있지만, 작가는 사회적 발언을 표면화하지 않는다. 작가는 영혼의 울림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새롭게 묻는다. ‘거짓임신 기간 동안, 우주 어딘가를 떠돌다 열달 동안 감싸였던 자궁을 떠나 아기의 몸으로 자기에게 올 영혼을 생각하면 형체 막연한 슬픔이 촘촘한 밀도로 경은을 감아들었다’는 대목에서 이 소설은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이혜경 소설집의 매력은 남달리 공들인 언어의 숨결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발효해버렸으면 싶은 기억은 양념이 다 삭아 어우러진 신김치 속에서도 제 맛을 주장하는 생강조각처럼 도드라졌다’라거나 ‘수챗가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 흘리기 직전의 마음처럼 멍든 빛깔인 달개비꽃을 뜯다가도, 그 노래만 들으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슬금슬금 기지개를 켰다’라는 섬세한 감각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은 분명히 아니다. 처음으로 접한, 조붓한 골목길 내부를 천천히 걷듯 읽어내야 할 문체다. 인생이 희치희치하다고 느¤?독자에게 이혜경의 소설 언어는 일상에 대한 신선한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정체모를 생의 스멀거림이 느껴진다. 놀빛에 감싸여 어둠침침하거나 모호하고 몽롱한 분위기만 감지된다. 그래서 남다른 주의력으로 읽기를 요구하는 소설집이다.

(박해현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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