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만큼 기나긴 동안 인류를 사로잡은 것이 있을까. 사랑은 시대와 사회,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며 수많은 문학과 미술, 음악의 모티브가 됐다.
‘사랑의 문화사’는 사랑의 과정을 살핀다. 기다림을 시작으로 만남, 청혼, 결혼식을 거쳐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겪는 과정을 고찰한다. 지은이
스티븐 컨은 미국의
문화사회학자. 또 다른 저작 ‘육체의 문화사’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등도 이미 국내에 소개됐다.
저자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문학과 미술 작품을 촘촘히 훑었다. 대상이 된 것은 1847년부터 1934년까지 87년간 생산된 예술 작품. 1900년을 기점으로 이전은
빅토리아 시대, 이후는 현대로 구분했다. 이 시기에 출간된 문학과 미술작품, 철학서를 분석해 컨은 사랑에 관한 18가지 주제를 끌어냈다. 이들 주제가 각각의 작품에 어떻게 표현됐는지 살펴봄으로써 시대에 따라 사랑에 관한 의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핀다.
사랑의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지은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길잡이로 삼는다. 하이데거가 ‘본래적-비본래적’ 구분에 따라 현존재의 실존을 해석했듯, 이 구분에 따라 사랑의 요소를 해석한다. 빅토리아 시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좀더 본래적인 사랑을 하게 됐다는 것. “현대인은 빅토리아인의 우아함과 통렬함 그리고 영웅주의를 얼마간 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의 의미를 더욱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수많은 소설과 미술 작품을 가로지른다. ‘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자’ ‘레 미제라블’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댈러웨이 부인’ ‘전망 좋은 방’ 등 소설만 100여 편에 달한다.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화가들의 그림도 상세한 설명과 함께 소개된다. 방대한 작품의 행간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엮어낸 저자의 깊이와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접하고 싶은 이들, ‘연애 기술’류의 가벼운 책에 식상한 이들,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소설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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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문화사
원제 The Culture of Love
스티븐 컨 지음,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 768쪽,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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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에서 연인들은 만난 지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곧 키스하지만 '
폭풍의 언덕'(1847)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제8장 입맞춤)
"'
보바리 부인'(1857)의 엠마는 자기가 딸을 낳은 걸 알게 되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는다. 어린 딸이 남자들 세계에 종속된 자신의 운명을 반복할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무지개'(1915)의 안나 역시 딸을 낳은 걸 알고서 실망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작가(D H 로렌스)는 안나가 '이 애가 내 젖을 빠네. 이 애가 나를 좋아해, 나를 사랑하는 거야!'와 같은 현대적인 모성애가 담긴 감탄사를 발하는 장면을 묘사한다."(제15장 결혼식)
'사랑의 문화사'는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랑과 연애, 결혼과 욕망 등의 변천사를 좇는다. 문학 작품 출간 연도로 보면 1847년부터 1934년까지이며, 두 시대를 나누는 기점은 1900년이다.
지은이 스티븐 컨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는 기다림.만남.조우.육화.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권력.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개 주제별로 사랑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거론되는 작품들이 워낙 많아 영미권 고전문학을 꿰고 있는 독자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쉴레.뭉크.발라동 등 미술 작품 57점에 대한 해석도 곁들여진다.
책장이 착착 넘어가는 책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분석 틀로 빌어왔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본래적-비본래적' 구분을 이해하는 몸 풀기가 필수다. 지은이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됐고, 이에 따라 비본래적 사랑에서 본래적 사랑으로 변화가 이뤄졌다"고 말한다.
그는 '본래적'이라는 단어를 '자기자신임'이라는 말로 바꾸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남녀의 성 역할이나 타인의 가치관에 맞추는 사랑은 '비본래적'이고, 사회적 상황에 당당히 맞서 사랑의 의미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사랑은 '본래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두 시대의 차이를 잘 알려진 소설 작품에서 관찰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예컨대 여주인공의 연령도 변했다. 분석 대상이 된 작품들 중 19세기 소설 여주인공의 평균 연령은 19.7세.'
레미제라블'의 코제트는 15세,'
제인 에어'의 제인은 18세였다.
반면 20세기 소설에서는 28.6세로 껑충 뛴다. 여주인공 연령 변화를 통해 "20세기 여성들이 연애 적정 연령에 대해 좀더 여유로운 태도를 가지게 됐고 결정적인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머리말에 "어떤 책은 전쟁을 다루기 때문에 중요하고, 어떤 책은 응접실의 여성의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비평가들은 생각한다"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의 문화사'는 울프의 불만을 달래줄 만한 책이다.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