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었을까 이 많은 꽃들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겐 꽃이 보인다. 그저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크고 환한 꽃이 보인다. 긴 겨울 내내 그 많은 봉오리들을 가녀린 줄기 어딘가에 숨겨놓고, 그렇게 견디고 견뎌 마침내 눈물 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는 단단한 마음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꽃이 가장 아름다운 건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니요, 그렇게 제 살 속에 《燦?아프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겨울이다. 봄이 올지 아닐지, 봄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도 꽃은 겨울을 나고, 겨울을 이기고, 겨울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랑도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삼키고 삼키는 눈물이 내 속에 쌓여 당신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소중한 것들이 모두 당신에게 향하는 길 위에서 스러지는 게 아니라, 내 살 위에 내려앉아 단단하고 빛나는 껍질을 만드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사랑은 봄이나 여름이 아니라, 아프고 아플수록 선명해지는 겨울에 끝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쪽
4월 이야기
녹색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갈색이나 주황색이 섞이지 않은 초록색. 그런 때도 있는 법입니다. 아무 것도 그립지 않고,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알아요? 내게 그 설레임마저 허락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쪽
비가 내리지 않는 비 사진
조금 늦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하루 종일 마음을 무겁게 적셔놓더니 이른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습니다. 요 며칠 별것 아닌 영화 한 편, 그렇고 그런 만화 몇 권 때문에 잔뜩 약해져 있던 마음에 내린 오늘의 비는 꽤 아팠습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쉽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다른 이의 눈에는 아마도, 끄적끄적 쉽게 글을 쓰고, 찰칵찰칵 쉽게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의 그리움을 쉽게 허락한 마음의 병쯤으로 생각하는 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어서, 참는 나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서 입을 앙다물고 당신을 놓아버렸지만 그리고선 이렇게 오래오래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비가 오면 나를 떠올리는 친구들에게 나는 조금 미안합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도 실은 조금도 비가 그치지 않는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니까요. 그치지 않는 빗방울 하나하나의 한가운데 초점을 맞추고 당신만을 바라보게 되는 내 마음속의 사진기를 보여주지 못하니까요. 오늘 비가 왔습니다. 나는 마음속의 그 사진기를 들고 걸어도 걸어도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길을 걸어 겨우 일렁일렁 당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산을 쓰고도 조금 비를 맞았나 봅니다. 열이 오르고 손끝이 날카롭게 예민해져 나는 꼭 당신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스르륵 당신을 어루만지는 나에게서 빠져나와 그 모습을 담고 싶어 찰칵 셔터를 눌렀던 건지, 아니면 그런 것 같은 꿈을 꾼 건지 자신이 없고 어지럽습니다. 마음과 눈앞이 흐려지는 건, 네, 비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그래도 혹시 당신, 내 손가락이 닿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까?-.쪽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무리 많은 기억들 속에 꼭꼭 묻어놓아도 가장 가슴을 아릿하게 할 꼭 그 순간에 다른 모든 불을 끄고 혼자 환하게 고개를 들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수많은 당신 속에서 나의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밝은 웃음들 사이에 묻어도 소용없기 때문에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질문만 보면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어요. 솔직히 그 누군가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단지 잠깐 스쳐간 인연인데 한때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 궁금할때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추억은 추억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추억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내게 이런 말을 해준걸 기억할까요?-.쪽
비가 그치면
비가 오면 그저 비가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쁘게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이 묶이고 수많은 마음들이 안타깝게 타올라 수증기로 동글동글 맺혀도 사라져버리는 한 번 만큼의 인연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비를 싫어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릅니다. 빗속에서 뒤를 자꾸 돌아다보며 당신에게서 멈칫멈칫 돌아오던 잔뜩 들뜬 나에게서 배수구로 사라지는 흙탕물 같은 나로 돌아오던 그 몇 번의 통증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비가 그치면 비도 그치고 소용돌이치며 어둡고 깊은 파이프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던 수많은 사람 수많은 마음들의 추락도 그칠 것입니다.
비가 그치면 눈물처럼 주룩주룩 속절없이 흐르던 나의 당신도 그칠 것입니다.-.쪽
당신이 아름다운 이유
내 눈에서 모든 색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내 귀에서 모든 소리를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내 손 끝에서 모든 느낌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심연 속에서도 모든 색과 모든 소리와 모든 느낌으로 반짝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통증처럼 아름다운 당신...-.쪽
그 자리
그곳에 두고 온 건가요? 그 자리, 그 시간 위에. 그래서 내가... 당신도, 아주아주 가끔은 그 생각을 하나요?-.쪽
테이블에 앉는 이유
테이블이 있습니다. 테이블엔 아무 것이나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테이블에 올려지는 것은 언제나 정해진 몇 가지입니다. 찻잔이 나오고, 찻잔을 데울 뜨거운 물을 담은 대접이 나오고, 찻주전자가 나오고, 쿠키나 비스킷을 담은 작은 접시가 나옵니다. 사소하지만 정해진 순서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통제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나올 것이 나오고, 정해진 일들이 정해진 대로 일어납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엔 말입니다.
마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니 누구든 들고 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마음속에 드나드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도록 정해진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다치게 하도록 정해진 사람이 나를 다치게 합니다. 내 마음이지만 내가 원한 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 대로"라는 말처럼 우스운 말이 또 있을까요.
매번 다른 사진 같지만, 실은 한 장소의 모습입니다. 하얀 잔과, 고동색 테이블과, 푸른색이 살짝 도는 노란 찻물과, 구두 닦아주는 하얀 강아지와, 빨간 그릇과, 그리고 초록색 화분 세 개… 매번 다른 자리에 다른 마음으로 앉아있는 것 같지만 사진으로 찍어놓으니 속일 수도 없는 한 곳이고, 한 마음입니다. 숨 쉬는 한 속일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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