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대성이라 해서 때를 잘 만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을 수식하는, 그런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위대성은 그 사람의 지위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지 사람 자체가 가지는 특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상황이 변하면 위대성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수상도 그 직을 떠나면 고작 잘난 척 하는 말 재주꾼이었던 게 아닌가 여겨질 때가 많고 장군도 부하도 잃으면 저잣거리의 보잘 것 없는 얘기 주인공으로 떨어지고 만다.
거기에 비하면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은 진짜였다. 그의 예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튼 그의 예술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민음사. 2000)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로 표현될 수 없고, 정의 될 수 없던 위대성만이 스트릭랜드를 표현 할 수 있었다는 화자의 말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스트릭랜드의 이상향에 비유된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팽개치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스트릭랜드. 그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간절히 원했던 ‘어떤 것’이 이미 가정 안에서 이해받을 수 없는 ‘달’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이 사후, 즉 그가 ‘달’로 떠난 후에야 평가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여는 말에 인용된 그의 ‘진짜 위대성’을 증명한다.
‘달’.
스트릭랜드의 이상향이 머물 던 그곳. 간절히 도달하고 싶어 했지만 생전, 도달 할 수 없었던 곳.
신예작가 한유주 역시 첫 소설집 <달로>(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달’을 열망한다. 달로 갈 수 없게끔 그녀의 발목을 죄는 것은 무겁고 너저분한 문장들이다.
“달의 뒷면에는 아름다울 무수한 바다가 있고 많은 시인과 소년들이 그곳에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발아한 문장들은 너무 무거웠고 소년들은 너무 어렸으며 나이를 먹은 후에는 어느 순간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들이 타박대기만 했다”
배수아를 떠오르게 만드는 ‘분열’된 문장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서사성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이 부정했다고 해서, 뒤가 찬성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를 스스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장들은 스스로 독립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허공을 부유하는 문장들은 조용히, 자박자박 자신의 ‘소리’를 낸다.
작은 소리지만 귀 기울이다 보면 작가의 모든 말이 기존 문학의 서사성을 해체하고 싶은 절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어를 한 글자 한 글자씩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들. 같은 문장의 낱낱의 음들은 입안에서 잠깐 구르다가 서서히 삼켜졌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는,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계속 읽다 보면 글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혀끝에 문자의 감각만이 남았다. 그러면 그들은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유주는 읽기를 배설로 쏟아져 나올 섭취 행위로 해석한다. 단어는 삼켜지면 사라질 음식물이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는 것처럼 사람들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읽는다. 삼켜지고 뱉어지면 사라질 음식물에 부득불, 부담스러운 서사성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함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어디선가 전해 들었고 먼지를 쌓아 만든 책꽂이에 길게 꽂힌 책들 중에는 물음표만 일렬로 찍힌 것이 있었다. 책장의 뒷면마다 물음표들이 날카로운 갈고리로 책장을 물고 놓아지지 않았고 여간해서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물음표가 책장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고 텅 빈 책의 껍데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습기에 천천히 녹았다”
넘겨지지 않는 문장, 읽히지 않는 책, 더러운 먼지만 불러들이는 물음표로 가득한 책은 “발기발기 찢고 싶은 대상”일 뿐이다. 시처럼 읊조려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 속에 배어있는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
타르코프스키적 평온 뒤에 숨겨진 놀랄만한 파괴본능은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강요를 통해 얻어진 ‘동의’의 허망함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8편의 단편이 조용히 묶였다 떨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작품 간의 간격은 무의미하다. 이어지고 흩어지는 데는 필연의 이유도, 분노할 만한 무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운 역사와 치기어린 독백들과 밤낮이 열네 번 오가는 동안에 쓰여진 문장들이 그런 식으로 책꽂이가 놓인 바닥으로 흘러 넘쳤고 마른 후에는 더러운 얼룩으로 남았다. 그런 책들을 집어 들었던 사람들은 물에 부풀어 솜처럼 풀어진 종잇장 속에서 긴 헤엄을 쳤다. 아무리 팔을 저어도 눈앞의 수평선을 넘을 수 없었다”
읽히지 않는 억지스러운 문장들, 생각을 강요하는 치기어린 독백들을 이해하기 위해 재독을 시도했던 독자들이 아무리 팔을 저어도 넘을 수 없던 수평선, 그것은 달로 향하는 금기의 선이다. 버겁고 이해되지 않던 문장과 단어를 완전히 덜어낸 후에야, 헤엄쳐 도달 할 수 있는 한유주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달로>는 박민규가 예고한, 혹은 배수아와 이인성이 보인 낯선 문장과 문단을 ‘가격’한 새로운 말 묶음이다. 한국문단의 기존 문장들은 한유주에게 낯설기만 하다. <달로>는 이해할 수 없던 문장들을 어떻게 해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묻고, 대답한 공부의 흔적이다.
“말을 줄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작가 한유주는 1982년생이다. 홍익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에 재학 중이며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외따로 떨어진 문장 안에 숨겨진 낯선 재능이 ‘길게’ 응집될 장편 후에 작가의 문학적 정체성이 다시, 논의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