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박해현기자, 전기병기자]
소설은 수다스럽지만, 소설 독자는 입을 다문 채 텍스트를 읽는다. 소설은 침묵 속에 소통되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활자 언어에는 침묵의 여백이 있다. 그러나 독서 행위 속에서 그 침묵이 망각되면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환각에 빠진다. 문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수다스러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문학의 소란스러운 언변을 거부하는 한 젊은 소설가가 있다.
2003년 계간 ‘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한 소설가 한유주(24·사진)가 첫 소설집 ‘달로’를 냈다. 소설 형식의 해체 실험을 해 온 소설가 이인성은 한유주의 소설을 끔찍히 좋아한다. “작품의 전체적 틀,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서사적 연계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화시키며 말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돌리게 만드는 침묵의 여백들이다.”
한유주의 소설에는 ‘뒷면’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달의 뒷면에는 아름다울 무수한 바다가 있고, 많은 시인과 소년들이 그곳에 발을 담그고 싶어 했지만, 발아한 문장들은 너무 무거웠고, 소년들은 너무 어렸으며 나이를 먹은 후에는 어느 순간 노인이 되어 있었다.”(단편 ‘달로’)

“기억은 망각의 뒷면이었고, 망각은 기억의 뒷면이었다”라는 그의 소설에서 ‘뒷면’은 산문의 영역이 아니라 시의 영토다. 희미한 언어의 흔적들이다. 분명히 일상적 현실 속에 있지만, 우리의 망각으로 인해 언어의 포충망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이다. 문학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일상의 뒷면’을 찾아가는 행위다. 그러나 그 뒷면에서 우리는 ‘텅 빈 세계를 기록한 지나간 시대의 이미 상해버린 필름’만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는 ‘삶과 죽음의 희비극’에 대한 씁쓸한 깨달음이다.
한유주의 또 다른 단편 ‘죽음의 푸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암시하면서 현대 문명의 광기와 폭력을 비판한다. 그러나 서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몽환적 이미지가 가득한 한 편의 산문시와 같은 소설이다. 왜 이렇게 쓸까. “말하고 싶다. 독백들이 움튼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기억을 되새긴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군데군데 뜯기고 구멍 뚫린 기억. 어느 순간 홀연히, 하나의 음처럼, 떠오르는 기억. 서로의 영혼이 증발하고,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영혼을 있는 힘껏 말하던 그때. 모든 사람들의 입술이 단 하나의 말을 속삭이고, 모든 사람들의 귓가에 단 하나의 음악이 들려오던 그때”(단편 ‘암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