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안소민 기자]
 
▲ <나카노네 古만물상> 겉그림
ⓒ2006 은행나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적인 전개와 반전, 범상치 않은 등장인물의 생애와 그들이 펼쳐보이는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 등 여러 요소가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적이고 독특한 세계가 바로 소설이 지닌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설은 어떨까.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흔하게 마주치는 이야기, 평범한 일상의 한 풍경과 같아서 전혀 새로울 것도 참신할 것도 없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 소재는 소설의 그것으로 낙제점이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작품은 오히려 일상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진가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가와카미 히로미의 장편소설 <나카노네 古만물상>도 바로 이러한 소설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길옆의 맑은 시냇가 밑바닥에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발견한 기분과도 같다. 이렇다 할 것 없이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이지만 그 소박하고 잔잔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움이 바로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이 작품은 나카노씨가 운영하는 고만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나' 히토미와 동료 다케오, 상점의 주인인 나카노씨의 그의 누나인 마사요, 이 네 사람을 주축으로 한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진다. 여기에 그 배경이 '고만물상'이라는 설정은 이 소설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친근하고 평범한 고만물상이 작품의 배경

나카노씨의 가게는 값비싼 전문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아닌 '말 그대로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가게이다. 특별한 상호도 없이 그냥 나카노네 고만물상으로 불리는 이곳은 1950년 이후 가정에서 쓰던 물건들을 취급하는 곳이다. 누구나 부담없이 물건을 구입하며 팔 수도 있고 지나다 구경삼아 그냥 들를 수도 있는 곳이다.

내 집처럼 편하고 스스럼없는 이 공간이 주는 친근함과 수수함은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온다. 이 작품에는 복잡한 줄거리도 없고 어려운 용어도 없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눈길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 네 명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2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그 소제목들은 바로 이 나카노네 만물상에서 취급하는 물건들로서 이에 얽힌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크라프트지 봉투, 문진, 페이퍼 나이프, 셀룰로이드 인형, 원피스, 재봉틀, 사발, 펀칭볼 등 그 소재부터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갖는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진솔하면서도 담백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탄탄한 요소이기도 하다. 복잡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이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여리고 솔직한 '나카노', 50대의 나이에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며 사춘기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잃지않는 '마사요', 20대 처녀의 순수함과 평범함을 그대로 지닌 '히토미', 그리고 학창시절 왕따당한 기억으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지만 우직하고 진실한 '다케오'.

히토미는 다케오의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성실한 모습에 이끌린다. 다케오도 히토미를 사랑하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않고 그런 다케오의 태도는 히토미의 마음을 애태운다. 이 소설은 이렇듯 히토미와 다케오의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손때 묻은 옛물건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연륜

특히 50대의 마사요와 20대의 히토미가 사랑과 성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이 소설에서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나 성 행위에 대한 묘사 대신 등장인물간의 허심탄회하게 주고받는 대사들을 통해 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야하거나 외설적이다는 느낌보다는, 건전한 일상에 뿌리를 둔 건강함과 솔직함으로 다가온다.

"저기, 히토미. '성욕'이란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 마사요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옛?"

"성욕이 없으면, 세상사는 맛이 없겠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 지 몰라 나는 묵묵히 타르트를 씹다가 꿀꺽 삼켰다.

"히토미는 아직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지? 부러워." 마사요씨는 레몬파이의 가장 두툼한 부분을 포크로 찍으면서 꿈꾸듯 말했다. -262쪽-

"나, 이제 연애하기가 무서워졌어." 마사요씨는 노래하듯 말했다.

"이제야 무서워진 거예요?" 내가 대꾸했더니 마사요씨는 "어머나, 히토미! 말하는 것 좀 봐."하면서 웃었다.

"성욕이 거의 말라버린 후에 뜨겁게 움켜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 여생에서 아주 없애지도 못하는 이 연애 감정을 히토미 같은 젊은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마사요씨는 그러고나서 라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273쪽-


'사랑'과 '성'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는 곧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로 이어진다. 남자친구 (다케오)가 며칠째 연락도 하지않는 것에 대한 고민하자 마사요는 히토미에게 '그새 하직한 것 아닌가 생각해'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사요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만 하다. '이 나이가 되고보니 사람 목숨이란 게 간단히 한순간에 끊어진다'면서 상대방을 너무나 독하게 몰아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십고개를 넘고부터 생각의 차이나 오해나 언쟁이 생겼을 때 예전처럼 간단히 상대를 몰아세울 수 없게 됐다...(중략)... 상대를 몰아세우기 전에 나의 격한 증오심과 독설을 감당할 수가 있을 정도로 상대가 건강한 지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나이 먹었다는 증거지."

빠듯하고 고단한 당신의 일상에 위안을 주는 이야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짝거리고 조심스럽던 새 물건이 적당히 손때도 타고 둥글어지는 것을 의미할까? 아니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일까? <나카노네 고만물상>에는 옛 물건이 주는 따뜻함과 정겨움, 더 나아가 삶의 연륜과 같은 지혜가 묻어난다. 바쁘고 긴장된 하루를 보내는 도시인들에게 이 책은 이러한 위안을 준다.

처음 지은이가 이 책을 구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지은이 가와카미 히로미는 출판사에서 원고청탁을 받아놓고 글의 시작도 못하고 있었단다. 그러던 차에 편집자의 전화를 받았고 제목이라도 알려달라는 편집자의 요구에 지은이는 마침 책상위에 있던 서류봉투를 보고 '크라프트지'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 이렇게 해서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탄생되었고 이야기가 술술 풀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인생이란 게 그런 것인가 보다. 생각지도 않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기도 하고 애써 머리 싸매며 궁리했던 정답이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기도 하는 것, 그게 인생 아닐까. 이 책을 읽고난 후 평범하지만 빛나는 삶의 진리에 슬며시 웃음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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