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그 또한 레닌만큼 위대한 혁명을 일으켰으면서, 레닌만큼 불행하다. 레닌의 불행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의 불행은 자본주의의 본질과 연관이 있다.-아인슈타인쪽
정치적 실패와 종교적 성화(聖化), 진리의 힘
마하트마 간디 1869~1948,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
정치적인 실패가 오히려 기적을 낳은 경우가 간디이다. 그의 삶을 보자. 아버지는 지방장관을 지냈지만 낮은 계급 출신이었다. '간디'란 야채상이란 뜻이다. 어머니는 비폭력과 채식을 중시하는 자이나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간디는 어머니한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담배와 술을 입에 대고, 거짓말을 하고 또 서양옷을 입던 청소년시절 그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죄의식으로 시달렸고, 그 죄의식이 그를 특징짓는 그 위대한 도덕성을 낳는다. 13살 때 결혼, 18살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변호사 자격을 딴다. 봄베이에서 변호사 노릇을 하다가, 1893년 남아프리카 소재의 한 인도 회사 법률 자문역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보낸 21년 간, 그는 극악무도한 인종차별을 목도하고 또 스스로 겪게 된다. 그는 남아프리카 인도인 공동체의 각종 항의 집회를 주도하고 점차 그 지도자로 떠오른다. 사타그라하(진리의 힘)로 알려진 비폭력 불복종의 사상과 운동 기조가 이때 서서히 싹트게 된다.-간디쪽
1915년 인도로 돌아온다. 그는 마을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특히 치안법 파동과 1919년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영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암릿차르 사건' 이후 인도국민회의의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영국 정부에 맞선 비협조, 비폭력ㆍ불복종 시민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그의 사상과 정책이 인도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는 영국 상품을 거부하고, 인도 마을의 물산산업을 진흥시키는 운동을 전개한다. 시위와 집회 외에, 단식투쟁도 벌인다. 그는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하층계급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노력한다. '접촉불가'의 최하층계급을 그는 '하느님의 아이들'이라 불렀다. 그는 또 전통적으로 반목 관계를 보여온 다수 힌두교도와 소수 그룹, 특히 이슬람교도 사이에 화해와 우의를 다지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1930년 영국 정부의 소금 독점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바다까지 도보로 행군, 공개적으로 염전을 차리고 소금을 뽑아낸다. 이 일로 그는 투옥된다. 아니, 이번뿐이 아니었다. 그는 숱하게 투옥되고 석방되고 다시 투옥되고 그러는 과정을 1922~1942년까지 겪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인도 침략이 가시화되자, 영국 정부는 일본을 물리치는 데 협조해준다면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인도를 완전 독립시켜주겠다고 제의를 한다. 하지만 간디는 자신의 비협조 원칙을 내세워 거절한다. 그는 다시 투옥되어, 1944년에야 풀려난다. 그 후 시작된 인도 독립을 위한 협상에서 간디는 네루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1947년 인도 독립이 이루어진다. 네루는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고 간디는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된다-간디쪽
미국인들은 링컨 이후 가장 깊은 애도와 경의를 그에게 푠햇다. 그는 명석한 경제계획가였고, 용기 있는 전쟁지도자였고, 무엇보다 난롯가 정담 라디오 방송의 자상한 아저씨였다.-루스벨트쪽
그는 레닌보다 젊으면서도 생각이 레닌보다 낡았다. (중략) 겉보기에 스탈린은 레닌과 99.9퍼센트 닮아 있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그 0.1퍼센트의 차이다. 레닌은 학자였지만 인민을 사랑하는 실천가였고, 스탈린은 혁혁한 전사였지만 자신만을 사랑하는 권력가였다. 그 점이 그를 그토록 증오로 낡게 했다. 스탈린의 집권을 막지 못한 것은 '병든' 레닌의 실제 정치력의 한계였다. 스탈린의 한계는 거의 전적으로 성격 결함 때문이다.-스탈린쪽
히틀러.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대공황의 집단 불안은 그의 무지한 선동력을 지도력으로 오해하고, 그에게 숨겨진 인종 증오에 불씨를 당겼다. 그 격렬한 증오는 그에게도 격렬한 고통 아니었을까, 지독한 쾌감으로 오인되는?-히틀러쪽
그의 소설이, 세상의 외면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내면을 샅샅이 드러내며, '악몽의' 예술 세계로 재구성해간다. 1912년에 쓰여진 《심판》이 결정적인 전기를 이루는 작품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이야기이다. 카프카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어 신과 인간의 관계에 이르는 인간 실존의 제 문제가 단순 명료해서 더욱 섬세하고 잔인한 사실묘사의 문체로 그려진다. 《변신》(1915)은 어느 날 잠에서 깨고 보니 거대한, 욕지기 나는, 게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 한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아들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구체적인 역사ㆍ계급의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제의 목적성의 '없음'을, 치밀한 정황 및 심리묘사로 메꾼다. 그때 부모의 반응은, 얼핏, 동정적이지만, 어느 계급 소설보다도 더 잔인하고, 각질이 깨진 벌레의 아픔과 슬픔이 뼈저리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는 장자의 노력은 그의 불행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그는 죽고 식구들은 안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평상생활로 돌아간다. 그 정치적 의미는 진부한 사실주의보다, 거울처럼 깊다.-카프카쪽
1919년 쓰여진 《유배지》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해석을 유혹하는 소설이다. 기발한 처형 방식이 등장한다. 죽은 지 오래된 옛 계명의 창조물인 어떤 도구가, 죄수의 살에 죄명을 새긴다. 그래서 죄수는 죽은 순간에야 자신의 죄명을 알게 된다. 하지만 《유배지》를 단순한 정치 고발 및 풍자소설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즉, 알레고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 또한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원죄의식, 벌에 대한 두려움, 삶의 불가해성 그 자체가 소재이자 주제인, 악몽 그 자체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철저하게 없다. 그 없음이 모든 '수준 낮은 이유들'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개인의 내적인 심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온갖 징후까지를 담아낸다. 《성(城)》(1926)은 그 이유 없음이 한 단계 더 깊어진다. K라는 사람이 이상한 마을에 겨울 숙소를 잡고 근처의 성에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등 온갖 집요하고 야비한 수단을 다 써봐도 들어갈 수가 없다. 그가 뭔가 의지하고 싶은 '고위층'은 도무지 만날 길이 없다. 혹시 성 안에는 아무도 안 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는 이런 소설들을 왜 쓴 것일까? 단지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너무 명징하고 투명해서 없음이 없음 자체로 드러나는 문체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삶의 난해함이 그의 문체 속에 동화처럼 분명하게 또 끔찍하게 포착된다. 즉, 그는 예술로 설명하는 것이다. 초기에 쓰여진 《아메리카》는 낯선, 이해할 수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청년의 방황과 투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최후작 《배고픈 예술가》는 인간들의 사회를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것과 타협하지도 못하는 예술가의 처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에게 삶의 실존은 예술가의 실존이다-카프카쪽
프루스트는 평생 동안 단 한권의 걸작에 몰두한 사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다 그는 자신의 모든것, 모든 현학과 감수성을 쏟아부었다. 프루스트의 이 걸작을 접한 후기 소설가들은 그의 주제와 기법을 따르거나, 아니면 그의 '해결방법' 일체를 거부하고 전혀 다른 소설 개념을 세우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가? 이것은 너무도 화려한 절망 선언 아닐 것인가? 하지만 그것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희망을, 있음과 없음을, 시간과 죽음을 다룬 또 한 소설가를 만나야 한다.-프루스트쪽
카프카와 프루스트, 그리고 조이스. 이들은 절망을 완벽 너머로까지 밀어붙였다. 완벽하게 재현된 시간이, 완벽하게 닫히다가, 완벽 그 자체만으로 그것을 넘어선다. 20세기 초의 그 강건한 낙관과 비관의 젊음이, 수천 년 늙은 시간의 '늙은 아름다움'으로 전화된다. 그것은 현대로, 미래로, 시간 속으로, 죽음 속으로 열린 창이다. 그리고, 창은, 그렇다, 희망이거나 절망이 아니다.-조이스쪽
그는 스탈린에게서 개인숭배를 배웠으되, 스탈린을 능가했다.-마오쪄둥쪽
마오 쩌둥은 위대하지만 실패한 이름이다. 저우 언라이는? 성공, 실패와 무관한 이름이다. 아니 '이름'이 아니고 흐름이다. 그렇다. 이름이 없다면 어떤가. 정치란 이름을 남기지 않고, 훌륭한 기념비나 건물을 남기지 않고 더 나아진 세상을 남기는 행위이다. 그걸 레닌이 알고 저우 언라이가 알았다. 스탈린과 마오 쩌둥은 알지 못했다.-저우 언라이쪽
사실 살아 있을 때 그는 그리 진보적이지도 유능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재임기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패기만만한 젊은이였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가능성 때문에 죽었다.-존F.케니디쪽
미국인들은 또 다른 비운의 대통령 링컨과 더불어 케네디를 가장 좋아한다. 링컨은 옛 '진보적이었던' 미국의 도덕을, 케네디는 미국이 세계 정신문화 타락의 주범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싶은 미국의 문화, 예술적인 자존심을 상징한다.-존F.케니디쪽
베트남 사회주의 건국의 아버지, 세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기로
호 치민 1890~1969, 베트남 공산주의자
제3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불행하다. 정치적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의 경제적 몰락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975년 호 치민에 의한 베트남 혁명은 말 그대로 그 두 가지 정반대의 방향이 겹쳐지는 역동의 기로였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 자본주의에 홀홀 단신으로 맞서 승리한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정글전은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1917년 러시아 대혁명 이래 가장 고무적인 일이었다. 미국민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과 패전에 대한 극심한 좌절감, 그 두 가지가 뒤섞인 기묘한 정신질환을 집단적으로 앓았고 지금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전체와 벌였던 근 백 년 동안의 길고 힘겨운 무력투쟁에서 베트남 혁명가들과 인민이 거둔 최종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1975년은 세계 사회주의의 경제체제 전체가 컴퓨터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경제 조류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고, 치명적인 낡음과 완고와 증오의 이빨만을 갈면서, 경제적 정치적 패배를 향해 곤두박질칠 때였다. 호 치민이 죽은 후 '헐벗은' 베트남은 별 권력투쟁을 겪지 않고, '백년 동안의 원수' 자본주의에 문호를 개방한다. -호치민쪽
영화의 '자본주의적' 본질은 어느 정도 예술성과 대중성의 결합을 요구하는 면이 있다. 자본의 '양'이 예술적 '질'을, 어느 정도 강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자본의 '자본성'은 동시에, 예술의 '예술성'을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면서 스스로를 확대 재생산한다. 강력한 국가 지원으로 만들어졌던 소비에트 영화는, 정반대로, 소비에트 권력의 영화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해, 선전선동 주의적으로 착취당했고, 그 폐해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폐해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마르크스의 "현재 소외되지 않은 유일한 노동은 자본에 맞서 스스로의 해방을 쟁취하는 예술 창작 행위뿐이다."라는 말은, 소비에트가 멸망한 지금, 백 년만큼보다 질적으로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채플린의 '대중' 영화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프루스트나 조이스와 달리, 어떤 가난에의 향수라는 한계를 완전히는 못 벗고 있다. 그 한계 자체의 예술력이 그리 막강하므로, 그는 지금, 그의 신사ㆍ거렁뱅이 시대보다 몇십 배 더 풍요로운 지금도 그냥 그때의 채플린일 뿐이다. 흑백의, 귀여운 악동광대, 눈물겨운 웃음의 신사ㆍ거렁뱅이 코미디언. 그의 흑백은, 죽음의 그것과 달리, 지금 이 세상의 총천연을 더욱 총천연이게 하는 흑백은, 아니다? 아니다. 아하, 영화, 헛된 대중예술영화. 어디서부터 그가, 아니게 되었지? 그는 그냥 채플린이다. 그것이 정말 위대하지만, 아하 영화……. 그 요란한 대중예술영화가 배우도 광경도 명장면도 녹아들어 심성을 그냥 뭉클하게 하는, 원인과 정체를 꼭 알 필요도 없는 기억의, 서정의 앙금으로 남는 길은 무엇-찰리 채플린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