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유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용케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 왕이 될 것인지 왕의 전령이 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리 저리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특성상 모두들 전령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덕분에 왕이 된 사람은 한명도 없이 온통 전령들만 있게 되었고, 그들은 온통 세상을 뛰어 다니면서, 전달사항의 수신자이자 발신자인 왕이 없기에 무의미해져 버린 소식들을 서로에게 외쳐 댔다고 한다. 더 이상 의미도 없는 이 비참한 전령의 삶을 기꺼이 그만두고 싶어도, 처음 전령이 될 때 맹세한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서약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낸 채 말이다.

작가로서의 길은 실은 어느 누구 듣는 이 없을 세상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있되 명확한 수신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현실에서 ‘전령’은 메신저로서의 서약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가 바로 낭만이 이야기되는 접점일 것이다. 작가 이외수의 젊은 날의 기록에는 따라서 낭만과 사랑의 ‘전령사’로서의 의무감이 각인되어 있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야기, 그리고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었던 고난과 아픔의 기록을 담은 두 권의 산문집(‘내잠속에 내리는 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에는 개념화와 재해석을 거부하는 수많은 기존의 이미지들이 나름의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회상이라는 거름종이에도 채 걸러지지 않은 청년 이외수의 삶을 한계지우는 여러 섬뜩함과 처절함의 에피소드들은 진정한 낭만성은 아닐 것이다. 이외수는 서술적 글쓰기가 아니라 묘사적 문체로 소설을 쓰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서술되어질 때 보다 묘사되어질 때 더욱 선명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일상의 통속화와 개념화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문청 이외수가 ‘얼음밥’의 수행을 거쳐서 모든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면서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게 되고, 만물의 영혼과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따뜻한 마음과 사랑에 대한 눈뜸의 과정이다.

개념화와 이론화의 사각지대를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기존의 제도교육이 지닌 경직성의 재생산에만 매몰된 가식적인 교육에 비하여 이외수가 친화력을 느끼는 참교육이란 ‘머리가 좋은 사람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좋은 사람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춘천교육대학 시절 매달 이발비 명목으로 생활비를 도와주던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을 작가의 길로 이끌어준 선배 문인들에 대한 언급, 그리고 첫 소설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장미촌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호소하고 있다. 이외수가 주장하는 낭만성의 근저에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거부하던 새로운 개념화의 시도가 자리 잡고 있은 것은 아닐런지.

출처불명의 카프카의 일기문을 인용하며 대학생들에게 열린 마음의 개성적인 인간이 되라고 외치는 글에서 우리의 기인은 다음과 같이 처음 ‘전령’이 되었을 때 맹세한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대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열려 있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것 들이 가슴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가슴을 통해서 소멸한다. 비극도 불행도 전쟁도 평화도. 하지만 열려 있는 가슴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멸시킬 수도 없다. 도서관으로 가라. 가서 전자오락을 하듯이 온 정신을 다 집중해서 책을 읽으라. 닥치는 대로 읽으라. 그러면 그대의 가슴 안에 무엇이 고이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대학생과 국화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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