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은 흩날리는 빛으로 온통 흰색이었고 가장 긴 풀입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발자국은 눈 위에 새겨져 언덕의 맨 끝 솔밭길까지 이어져 있다 난 그녀를 볼수 없다. 희뿌연 안개 스카프가 검은 숲과 흐릿한 오렌지빛 하늘을 흐려 놓았기에. 그러나 그녀는 초조하게 추위에 떨며 기다리겠지 초조하고 차갑게, 흐느낌 같은 것이 싸늘한 한숨에 스며들면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더욱 가까워질 뿐임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 선뜻 오고 마는 걸까 언덕길은 험하고 내 걸음은 더디다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왜 그녀는 오는 것일까
- 겨울이야기, D.H. 로렌스-.쪽
J, 가끔 우리는 이게 절벽인 줄 알면서도 그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어 한다고 당신은 제게 말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것이 수렁인 줄 알면서도 눈 말갛게 뜬채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고. 가끔 머리로 안다는 것이,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고, 또 이렇게 하면 그와 끝장이 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마지막 말을 하고야 만다고 그대는 제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절망적으로 만들까요?-.쪽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짧지만 강렬한 말이네요.-.쪽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 기형도-.쪽
J,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기억 위로 세월이 덮이면 때로는 그것이 추억이 될 테니까요. 삶은 우리에게 가끔 깨우쳐줍니다. 머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음이 주인이라고.-.쪽
이 사랑 이토록 격렬하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하는 이사랑 대낮처럼 아름답고 나쁜 날시에는 나쁜 날씨처럼 나쁜 이토록 진실한 이 사랑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어둠 속의 어린애처럼 무서움에 떨 때에는 이토록 보잘것 없고 한밤에도 침착한 어른처럼 이토록 자신있는 이 사랑 다른 이들을 두렵게 하고 다른 이들을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
- 이 사랑, 자크 프레베르-.쪽
누구에게나 소주를 처음 먹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먹게 한 사연도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먹고 일어났던 갖가지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의 기억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대개 한 인간이 청춘이었을 무렵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이 그리 많지 안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이들은 떠오르는 밝은 해나 불어가는 바람곁에도 위로를 받겠지만 마음속 고통의 압력이 몹시 높아져서 어떻게든 그것을 빼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느낄 때, 저는 자주 소주 생각을 합니다. 맥주도 아닌 와인도 아닌 위스키도 아닌 소주라는 그 투명한 액체를.
=>소주를 처음 먹던 날은 기억에 나지 않아요. 술이라는 것을 처음 먹던 것이 폭탄주였으니깐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던 그날... 그렇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날이네요.-.쪽
꽃 사이 한병 술, 친구 없이 혼자 든다 술잔 들어 달님을 청하니 그림자랑 세 사람이 된다 달님은 마실 줄을 모르고 그림자는 흉내만 내는구나 잠깐 달님이랑 그림자랑 함께 즐기자 이 봄이 가기 전에. 내 노래에 달님은 서성거리고 내 춤에 그림자는 흐늘거린다 취하기 전에 함께 즐겁지만 취한 다음엔 각각 흩어지리 영원히 맺은 담담한 우정 우리의 기약은 아득한 은하수
-월하독작, 이백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월하독작'이라... 정말 저 말처럼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고 싶어요.-.쪽
둘이서 대작하는데 산꽃이 피네 한잔 한잔 또 한잔을 마시다 보니 나는 취하여 잠이 오니 자네는 가게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다시 오게
-산중대작, 이백
=>정말 못 말리는 술꾼이십니다..^^-.쪽
J, 가끔씩 내가 아직도 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끔은 그렇고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가슴이 무너져내릴 때 나는 내게 아직 젊음이 남아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생각합니다. 벌써 너무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독재자들이 저지르는 만행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을 영영 젊거나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늙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생을 바쳐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미덕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사람이 참 슬프고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을 가르쳐주는데 있지 않을까요? J, 언젠가 당신이 물으셨습니다만, 저는 저의 젊은 날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때 그토록 젊은 친구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쪽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쪽
그렇게도 당신은 레몬을 쥐고 있었어 쓸쓸하고도 하얗고 밝은 병상에서 내 손에서 넘겨받은 레몬 한 조각을 당신의 단정한 이로 꼭 깨물어 토파즈 색으로 향기가 일고
그 몇 방울 안 되는 레몬 즙에 당신은 의식을 되찾았지
당신의 맑고 파아란 눈이 희미하게 웃고 내 손을 쥔 당신의 손엔 힘이 넘쳤어
당신의 목에서는 거친 바람이 불었어도 그처럼 위대한 생의 한가운데에서
치에코는 원래의 치에코가 되어 일생의 사랑을 한순간에 부어넣었지 그리고 한동안 그 옛날 산정(山頂)에서처럼 심호흡 한 번 하고 당신의 기관은 그대로 멈추었어
사진 앞에 꽂은 벚꽃 그늘에 차갑게 반짝이는 레몬을 한 개 놓아야지
- 「레몬 애가(哀歌)」,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레몬의 향이 느껴지는 글이네요.-.쪽
그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여느 때처럼 고요한데 그이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쌍한 눈이여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신사꽃이 피었다 노래가 지나간다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해안에서 그이는 그 사람에게 입을 맞추었다 레몬의 달이 물결 사이에서 미소지었다 바다는 내 피로 붉게 물드는 일 없이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감미로운 하늘이 있다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 「발라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쪽
우울에 잠기며, 홀로 외로이 육교를 건너간다. 일찍이 그 무엇에도 타협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안이하지 않던 이 하나의 감정은 어디로 가야 하나. 석양은 지평에 나직하고, 환경은 분노에 타고 있다. 모든 것을 증오하고, 분쇄하고, 반역하고, 조소하고, 참간(斬奸)하고 적개하는, 이하나의 검은 그림자를 망토에 감싼 채, 홀로 외로이 육교를 건너간다. 저 높은 가공의 다리를 건너, 아득한 환등의 시가지까지.
- 「육교를 건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쪽
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비 내리고 바람은 쉬지도 않고 넝쿨은 아직 무너져 가는 벽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붙어 있건만 모진 바람 불 때마다 죽은 잎새 떨어지며 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내 인생 춥고 어둡고 쓸쓸하다 비 내리고 쉬지도 않고 내 생각 아직 무너지는 옛날을 놓지 아니하려고 부둥키건만 지붕 속에서 청춘의 희망은 우수수 떨어지고 나날은 어둡고 쓸쓸하다
조용하거라. 슬픈 마음들이여! 그리고 한탄일랑 말지어다 구름 뒤에 태양은 아직 비치고 그대의 운명은 뭇사람의 운명이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 있는 법이니
- 「비오는 날」,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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