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 절 향해 싱긋 한 번 웃어줬으므로 그게 은빛 탄환처럼 제 가슴 꿰뚫어 제 전 생애가 단번에 휘청거렸다는 것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요? 한 순간 한 줌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단정하게 걸어가던 제 미래를 여지없이 꺼꾸러뜨려 버렸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뒤로 그대 생각만 해도 눈물 흐르고 마음이 피처럼 붉어지는 바에야. 어떻게, 이토록 단 한 번에 정통으로 깊이 숨겨둔 제 사랑을 관통시켜 버렸는지. 복장 터지게 억울하면서도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그대 무심에 핏발 섭니다. 내 마음 이토록 쉽게 뚫려야만 했던 것인지 지금도 정신 나가고 넋 나갔습니다.
'단 한번에'-.쪽
인영은 입이 조금 벌어진 채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다시 보았다. 지금은 키도 작고 말랐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나갈 녀석이긴 하다. 야무짐으로 빛나는 얼굴. 어쩌면 나중에 참 멋진 청년이 되겠구나 싶기도 하지만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분명 나를 오랫동안 남몰래 좋아해 온 소년 같긴 한데, 상처를 입을까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고. 아니면 코웃음치고 얼버무리듯, 도망치듯 남자와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남자친구가 나서서 흠씬 패주라고 할 수도 없고. 저, 저 녀석……. 좀 봐! 점점 더 결의를 다지는 듯한 저 표정. 한 발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자세야. 말이 전혀 안 통하는 녀석인데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쪽
재민의 주된 관심이 인영이 누나에게 완전히 옮겨가기 전까진 거의 매일 하루 한 시간 이상은 성당의 소녀상을 보러 찾아갔었다. 포도송이 모양의 푸른 꽃이 주렁주렁 열리듯 피는 등나무 아래에 놓인 긴 나무의자에 앉아 또래로 보이는 소녀상을 보고 있으면 그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음이 덥혀지는 듯 따스해졌다. 조금은 부푼 흰 가슴에 모은 소녀의 두 손을 보고 있으면 까닭 없이 눈물이 났고 미소가 머금어졌다. 폭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 흰 손이 가진 평화스러움과 한없는 위로가 느껴져서였다. 사람들이 모두 다 저렇게 평화롭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손이 만드는 가족과 집과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재민은 문득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서울과 큰형의 집, 그리고 학교에서까지 잘 적응하지 못한 그로선 그의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중곡성당이었다. 소녀상은 재민의 세상 유일한 친구이었다. 소녀상은 늘 한곳에 서서 늘 그를 기다려주는 소녀로 변해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그의 그리움이 된 것이다. 재민에게 있어 서울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는 맑고 매끄러운 흰 석고 소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쪽
목련은 잎 없이 먼저 꽃을 피운다. 다른 나무나 꽃나무들은 거의 다 잎새가 먼저 피어나고, 수많은 잎들이 바람결과 햇빛의 온도를 감지해 본 뒤 숨겨놓은 꽃순의 문을 노크해 나오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마치 공주의 행차를 알리는 시녀들처럼.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서로의 어여쁨과 아름다움을 시샘이라도 하듯 앞 다투어 꽃 봉우리는 꽃망울을 터뜨린다. 순식간에 나무 하나를 소란스러운 화색으로 가득 채운다. 앙상하지만 깨끗한 벗은 몸매 같은 맨가지에서 하나 둘 탐스럽게 피어나는 목련의 모습은 고고하고 정결하다. 재잘거리는, 수다스런 잎들과는 결코 같이 피거나 나무에 함께 매달리지 않는 목련꽃의 습성은 가히 결백적이다. 흰색과 미색의 중간색, 혹은 티 하나 묻지 않은 흰색으로 꽃이 핀 모습은 처음 흰 블라우스를 입고 외출하는 턱선 고운 처녀의 우아한 자태와 미소를 보는 거 같다.그러나 잎 없는, 번잡과 소란을 싫어하는 목련이어서 그런지 그 순결한 꽃잎이 떨어질 때는 더없이 참혹하다. 검은 사신(死神)이 그 동안 시샘하기라도 했듯이 무참하게 짓밟아 그 희고 빛나던 꽃의 살결을 검게 물들인다. 기껏해야 꽃나무인 주제에 뭐 그리 순결하고 깨끗하냐고 냉소를 퍼붓듯 바닥에 떨어진 두툼하고 커다란 흰 꽃잎을 순식간에 완전히 거무튀튀한 검은색으로 만들어버린다. 목련나무는 그 꽃들이 다 떨어져서야 잎을 피운다. 지나간 사랑을 푸른 가슴으로 노래하듯이 잎들을 가슴빛으로 돋궈내는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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