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의 맞수 되기 이승만의 라이벌, 김구.조봉암.신익희.조병옥
절대권력과 맞짱을 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도 있어야 하고 머리도 있어야 하고 또 능렬도 갖춰야 한다. 김구, 신익희, 조봉암, 조병옥 이 네 사람은 모두 이승만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중에는 이승만이 진정 죽어줬으면 하고 바랐을 인물도 있겠지만, 꼭 죽일 것까지는 없었던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다. 브레이크 없는 초고속 권력열차 '이승만호'에 동승했다가 내팽개쳐진 네 사람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쪽
<위임통치안>과 신채호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 대통령 월슨에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건의해볼 생각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장차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아래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둠으로써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시켜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안>을 백악관에 제출한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단재 신채호 ㅡㅇ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조선 민족의 이름을 걸고 위임통치를 청한 것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큰 누를 끼친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이를 사과하고 청원서를 취소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승만은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단재는 이 일을 들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 시절 신채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쪽
얼굴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이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쪽
조봉암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전력 때문이 아니라 당시 조봉암의 활동 때문이었는데, 문제가 된 것은 조봉암의 '통일관'이었다. 이를 위해 우린 잠시 이승만의 통일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는 이승만의 통일론 혹은 제1공화국의 통일정책을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통일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즉, 통일, 통일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사실상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게 그의 통일론이란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의 통일론은 다소 '이율배반적' 측면이 있었다. 우리가 굳이 '정복conquest', '합병annexation'이란 말 대신 '통일unification'이란 말을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 무지몽매한 중세인들의 '정복통일'과 달리 오늘날의 남북통일은 평화적이고, 상호 유익하며, 또 동등한 입장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일 테다. 한데 이승만은 앞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듯, 매우 '중세적' 멘탈리티를 갖고 계셨다. 그에게 남북통일이란 천 년 전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삼국통일'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오죽했으면 6ㆍ25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주한 미대사에게 "이건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요, 기회!"라며 철없는 소릴 하셨겠는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런 이승만의 '시대착오적 통일관'에 붙여진 이름은 바로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이었다. '북진'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짜릿짜릿해지는 일부 '변태'분들은 엑스터시를 느끼실지 모르지만, 사실 가능성을 따진다면 '0'에 가까운 통일론이다. 미국 관리들조차 이승만의 이런 통일론에 대해 "이승만에게 통일이란 남한 정부의 통제권을 북으로 확장하는 것"(1954년 2월 14일, 미국무부 정보조사국 작성)이라며 그 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했으니 말이다. 원래 이승만의 정치-외교 스타일이 '가능성' 따위는 중시하지 않았다 -.쪽
조병옥은 이걸 몰랐던 것이다. 민권운동이란, 민주주의란, 명망가 몇몇이 인민의 이름을 도용하기 위해 동원하는 레토릭이 아니다. 무능해 보이는 저 인민들이 떼로 뭉치면 없던 능력이 생길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설탕도 한꺼번에 서너 포대 먹이면 사람을 죽게 만드는 법이니까.-.쪽
고약한 사회학자들의 경우, 이 고맙고도 필수적인 경찰ㆍ군대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견犬과에 비교하기도 한다.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좀 심하다. 아무튼 이렇게 밥그릇에 따라 일제히 군복을 갈아입은 대한민국 건군의 주역들은 크게 세 종種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품종은,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비교적 순종에 가까운 혈통들이다. 100퍼센트 순수혈통 일본인 졸업자에 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에 가장 가깝다. 이 출신들 가운데에는 조선인으로는 가장 높은 계급에까지 올랐던 홍사익(洪思翊, 1889~1946) 중장(필리핀 포로수용소장) 같은 인물도 있는데, 불행히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니, 이 품종들이 얼마나 순종에 가까웠는지 알 만하다.-.쪽
두 번째는 일본이 만주라는 괴뢰국에 세운 사관학교 졸업자들이다.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만주군사관학교) 졸업자들이 그들이다. 바로 5ㆍ16의 주축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육종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순수혈통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인 개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기도 하고, 일본육군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정일권(丁一權, 1917~1994)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세 번째는 지원병(학병, 징병)으로 군대에 간 부류들인데, 수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5ㆍ16 직후 내각 수반에 올라 쿠데타의 '얼굴마담' 역을 맡았던 장도영(張都暎, 1923~ )이나 박정희의 최후를 코앞에서 목격한 김계원(金桂元, 1922~ ) 같은 사람들이 지원병 출신이다. 이 가운데는 돌연변이들도 꽤 있어서 전혀 다른 종으로 진화한 경우도 있다. 장준하(張俊河, 1918~1975)처럼 광복군에 투신한 경우가 그렇다. 이상의 종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인 광복군 역시 건군 과정에 참여했다. 이범석(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과 송호성(宋虎聲, 초대 국방경비대 사령관. 6ㆍ25 중 월북) 등이 그들인데, 그레샴의 법칙(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이든가? 같은 군인이라지만 이들이 어찌 한 무리에서 놀 수 있으랴. 북한으로 쫓겨가든지 옷을 벗든지 해서 이들 광복군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군과는 멀어졌다.
1948년 2월 10일. 바야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 실시를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경교장에서 분을 삭이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을 발표한다.
나의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비怨卑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의 이 성명은 한여름 더위를 싹 가시게 할 만큼, 소름 돋는 명문이다. 성명 발표 두 달 뒤, 김구는 김일성을 만나려고 38선을 넘었다. 물론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사람은 김구 외에도 많았다. 김구가 38선을 넘은 지 하루 만에 홍명희가 그를 따라나섰고, 또 하루 뒤 김규식이 그 뒤를 이었다. 박헌영은 그 1년 반 전 38선을 넘었는데, 그는 요란한 성명 따위는 남기지 않았다. 박헌영의 월북은 한동안 '비공식'적이었다.-.쪽
이들과 달리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을 통과하지 않고 에둘러서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부류들을 전자와 구분하기 위해 발명해낸 용어가 '밀입북'이다. 임수경과 문익환, 그리고 여기서 다루지는 않지만 황석영이나 오익제 천도교 교령 등은 모두 3국을 통해 북한에 입국했다. 북한 영역 내로 들어가는 행위의 동기를 묻지 않고 모두 범죄시하는 듯한 '밀입북'이라는 용어의 개발자는 모르긴 해도 안기부일 것이다. 역사에서 이처럼 특정 공간에 대한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사례는 종종 있었는데, 대부분 종교적 이유였거나 공중보건정책(?)상의 필요 때문이었다. 한데 20세기 이후에는 조금 특이한 양상을 띤다.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접근금지구역'이 형성된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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