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신정일 지음 / 푸른숲 / 2000년 3월
품절


나는 여행자, 산을 타는 사람이다.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하여 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쪽

수많은 산행을 통해서 체득한 것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산에 오를 수 없고 그 산행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 역시 그 누구의것이 아닌 나의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올라야 할 산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고 내 발길을 기다리는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쪽

건축학도의 필수 답사처인 극락전

이 극락전(보물 제663호)은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로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는 필수 답사처인다.-.쪽

극락전을 나온 나는 최순우 선생처럼 화암사 극락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초목이 우거진 산들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개울소리, 쉴새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고, 나는 허물어지듯이 적묵당 마룻바닥에 앉았다.

=>왠지 산속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 한켠이 아릿하네요.-.쪽

황금빛 금샘을 찾아가다

황금억새밭이라고 이름 붙여 있지만 지금은 철쭉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철쭉밭과 돌이 많이 깔린 비탈을 따라 한참을 다시 오르니 불썬봉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불써 있는 봉우리'라는 달마산의 정상의 봉화대는 조선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적당히 허물어지고 흐트러져 옛 정취를 일깨워줄 뿐이지만, 그 옛날엔 이 불썬봉에서 피운 봉화불이 갈두산으로, 완도의 상황봉과 좌일의 좌곡산으로, 화산의 관두산으로 함성처럼 퍼져나가고 들불처럼 번져갔으리라.-.쪽

달마산의 기암괴석들

달마산은 옛부터 남쪽의 금강산이라고 불렸다. 태풍을 만나 표류해 온 송나라의 어느 벼슬아치는 "해동 고려국에 달마영산이 있어 그 경치가 금강산보다 낫다 하여 구경하기를 원하였더니 이 산이 바로 달마산이로구나."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산을 일컬어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대봉이 날개를 퍼득이는 듯, 사자가 웅크리고 포효하는 듯한 형상이며 용과 호랑이가 어금니를 드러낸 듯하다고들 한다.-.쪽

주용기 씨의 '사철가' 한 자락이 천관산을 뒤흔든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그렇다. 인생이 계절과 같다면 나의 어두웠던 봄ㆍ여름은 추억의 구름 속에서만 머물고 지금 나의 계절은 가을일 것이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악장처럼 가을은 그렇듯 쓸쓸함으로만 오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가을은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가을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도 앞에서 가고 있던 지혜가 나를 바라보며, "이 길이 아닌가 보다."고 말한다. 나는 "길 아닌 길이 어디 있느냐. 사람이 가는 곳은 모두가 길이고, 우리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 길을 따라가는 길의 순례자들이다."라고 말했다.-.쪽

미처 도착하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느라 땀을 닦으며 쉬었다. 군대에서 구보뿐만 아니라 산행에서도 뒤떨어진 사람은 힘들게 마련이다. 함께 산을 오르는 아버지와 아들 중 아버지 김영남 씨는 선두대열에 속하고 아들 김나눔은 이름처럼 나누어주기 위함인지 듬직한 몸 때문인지 우리가 다시 일어설 때에야 올라온다. 늦게 온 일행들을 바라보며 이선희 씨가 한마디 한다.
"산을 오르다 잠시 쉬면 인생이 그곳에서 멈추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오르게 돼요."

그렇다. 삶이란 키에르케고르가 <반복의 개념>에서 설파한 것처럼 '반복'일지도 모른다.
"힘들게 산을 오르다보면 내가 왜 왔는가 후회하고 겨우 정상에 오른 후엔 잘 왔었다고 생각하고는 또 다시 산에 온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삶이란 어차피 반복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현란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다가 나이 사십이 넘어 중년에 접어들면 반복이 거듭되는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쪽

옛 사람들의 산행법
"우리의 옛 선조들은 단순히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행을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거나 기념사진을 찍고, 마치 시지프스가 돌을 밀어올리고 나서 허무하게 다시 산을 내려가는 것처럼,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면 가쁜 숨을 고른 다음에 상투를 풀고 긴 머리를 풀어헤쳤다고 합니다. 1년 내내 망건으로 죄고 있어야 하는 머리를 풀고 바람 부는 방향에 서서 그 머리를 바람에 맘껏 날렸던 것이지요. 바람으로 빗질을 하는 이 풍습을 즐풍이라고 했는데, 방향을 가려서 하였습니다. 동풍은 좋지만 서풍이나 북풍에는 하지 않는 법이라서 그날 풍향을 살펴 등산을 하였다고 합니다. 즐풍, 즉 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한 다음 거풍 단계로 접어드는데, 바지를 벗어 하체를 노출시킨 다음 햇볕이 내리쬐는 정상에서 하늘을 보고 눕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즐풍과 거풍 습속은 은폐하고 얽매어놓았던 생리적 부분을 해방시키는 뜻도 있지만 그 목적은 실리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즉, 자연 속에 산재되어 있는 정을 받는 동작이자 의식이었던 것이지요.
태양과 가장 가까운 정상에서 하체를 노출시켜 태양과 맞대면시켰던 거풍 습속은 양(해) 대 양(성기)의 직접적인 접속으로 양기를 받는다고 믿었던 유감주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도 남도에서는 거풍재ㆍ거풍암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고, '벼랑밭 반 뙈기도 못가는 놈 거풍하러 간다' 라는 속담도 있는 것을 보면 거풍이나 즐풍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쪽

황지천에 검붉은 물이 흐른다. 그 물은 구문소 지나 봉화로 접어들고 청량산 아래를 지나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이른 아침 검붉은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답답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했다. 어디 하나 트인 곳 없는 어둠, 그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고 누군가는 말하였다. 그 새벽에 우리들 마음속에 종소리 울릴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수천 년, 수백 년, 수십 년 동안 그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가슴앓이를 하는 나라가 보이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 나라를 견고히 지켜온 사람들의 해맑지만 쓸쓸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우리가 살고 우리가 뼈를 묻어야 할 이 나라는 어디쯤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맑아질 것이고, 우리들은 맑게 흘러가는 그 강물 같은 날들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는 정녕 있을 것인가?

=>우리가 누린 자연의 혜택을 우리의 자손들에게 누릴수 있는 기회를 줘야겠습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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