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지역의 여석개 공화국(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마케도니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연방으로 구성.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 2개의 알파벳사용(동슬라브와 남슬라브 일부(불가리아인과 세르비아인)는 비잔틴과 동방정교회의 권내(圈內)에 들어가 키릴문자를 사용하였고, 나머지 남슬라브(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서슬라브는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교 세력권 내에서 라틴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쪽
로마 카톨릭을 신봉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달미치야는 그레고리력을 택했으나, 러시아나 그리스처럼 정교회를 믿고 있던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본테네그로와 불가리아는 율리우스력의 사용을 고집했다. 율리우스력은 16세기에는 그레고리력보다 10일이나 늦었으나 20세기 들어서는 3일 더 늦어졌다.-.쪽
지금은 베오그라드의 외곽 지대가 된 다뉴브 강 건너편의 소도시 제문(Zemun)은 여전히 크로아티아에 속한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아 있었다. 지금도 제문의 사람들은 이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유럽은 제문에서부터 시작한다."-.쪽
프라하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가 팔라츠키가 슬라브족의 자유 회복을 목표로 '범슬라브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움직임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목표가 무엇이든 실질적으로는 권위적인 러시아 황제를 돕기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의 채찍'이라고 꼬집었다.
=>프라하에 살게 되어서인지 이제는 프라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관심이 생깁니다.-.쪽
1878년 베를린에서 열린 강대국 회의는 발칸 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회환을 남겼다.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는 독립 국가로 인정했으나, 불가리아는 불가리아와 루멜리아(Rumelia :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등 구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분리시킨 뒤 터키의 지배를 원칙으로 하되 자치권만 허용하자고 합의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터키의 영도로 인정하지만 치안이 안정될 때까지는 오스트리아가 다스리도록 했다. 알바니아 또한 터키의 속국이 되었으나, 몬테네그로는 522년간 그랬던 것처럼 독립 국가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쪽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비해 타종족간의 불화가 훨씬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 타종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의 종족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비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엇다. 타종족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아내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종족 편에 서서 자기 종족에 대한 증오심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다민족과 살면서 생기는 독특한 문화네요.-.쪽
"울음을 그치고 잠자지 않으면 '체사르그라드의 검은여왕(Black Queen of Cesargrad)'이 잠아간다"
이 검은 여왕은 1573년 농민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체사르그라드 성에 살고 있던 바르바라 에로디(Barbara Erdy) 백작부인이었다. 폭동을 주도했던 구베츠의 추종자들은 체사르그라드 성에 쳐들어가 집달관을 목매달아 죽이고 성을 불질러 버렸다. 티토가 살았던 동네의 언덕 위에서 성의 잔해를 훤히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끔 친구들과 폐허가 된 성에 가서 불을 질렀던 농민들의 흉내를 내면서 놀곤 했다. 티토는 폭동의 비극적인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구베츠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거둔 이야기나, 그의 추종자 6,000여 명이 쿰로베츠의 동네 어귀에서 효수당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었다..-.쪽
그 이후에도 쿰로베츠에서는 또 다른 폭동이 일어났다. 부다페스트의 헝가리인들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통치하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1848년 혁명 때 혁명 진압에 공헌한 대가를 헝가리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그의 각료들은 헝가리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헝가리의 모든 특혜를 크로아티아인들은 철저히 배제한 채 헝가리인들에게만 부여했다. 크로아티아 총독을 헝가리 수상이 임명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의 크로아티아인들에 대한 통치는 날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던 슬로베니아는 이런 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00년 스코틀랜드 고지의 많은 젊은이들은 1692년에 일어났던 글렌코 학살(Massacre of Glencoe), 1746년의 컬로든(Culloden) 만행, 그리고 19세기 초 고원 개척지로부터 소작인들을 축출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보복보다 목전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자리가 급했다. 미국이란 신천지를 찾아가는 길 밖에 없었다. 티토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쪽
무정부주의자들은 절대군주나 왕실 가족들의 안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세기에 걸쳐 최고 통치자의 암살은 정치적인 무기가 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정말 그 당시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지요. -.쪽
레닌은 애초부터 의회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우리에게 일정 기간의 독재 체제 없이는 무산 대중이 집권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착취자들이 그랬듯이 끈질긴 저항과 어떤 종류의 강압적 수단이라도 서슴지 말아야 하낟. 기득권을 양보할 뜻이 전혀 없었고, 특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착취자들에게 협력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649년의 영국이나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이 혁명의 중심 세력의 부르주아지는 외세를 통해 반혁명을 도모했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조금의 협상통로로 령어 주지 않았다."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당 독재를 뜻했으며, 볼셰비키가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이런 행태들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쪽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Moravia)에 더불어 헝가리 통치하의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Ruthenia: 카르파티아 산맥과 우크라이나 일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의 면모를 갖췄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연합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영토에 포함시켰다. 헝가리 남쪽 보이보디나도 유고슬라비아가 차지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이스트라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쪽
세르비아 페타르 1세의 아들이자 왕세자로서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을 지휘했던 알렉산다르 1세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즉 유고슬라비아의 왕이 되었다. 1918년 12월 1일 새로운 왕국이 출번했다.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세 나라는 후에 '소삼국협약(The Little Entente)'을 맺기도 했다.-.쪽
세르비아가 새로운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고, 연합국의 의지이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전쟁중에 보여준 세르비아인들의 용맹을 높이 샀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침공을 잘 막아냈고, 독일이 오스트리아 지원에 나서자 눈 덮인 산을 넘어 아드리아 해안까지 후퇴한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영웅적으로 저항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쪽
1920년 여름 볼셰비키 지지자들은 시민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러시아 전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국 정부들은 하는 수 없이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을 현실로 받아들였다.-.쪽
몬테네그로 출신으로서 베오그라드대학에 다녔던 밀로반 질라스는 공산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 뒤 당시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상주의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피해를 당해서라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로 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받고 있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지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해방시켜 보다 편안한 생활을 보장해 주고, 평등과 형제애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서 모두 혁명가가 된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초기에는 야망을 품거나 사리사욕을 탐하여 공산주의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지요."-.쪽
여러가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티토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1962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민족적인 과제를 해결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공산당이 집권하여 유고슬라비아연방을 결성하기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세르비아 체트니크, 이슬람교도 파시스트들이 살육전을 벌여 100만 명에 가까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이슬람교도들을 서로 죽였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소망이 소수 민족이란 개념을 뛰어넘어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다. 정부의 홍보 담당 기관들도 이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이슬람교도를 유고슬라비아인으로 한데 묶는 데 힘을 기울였다.-.쪽
그러나 모든 곳에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동류 의식이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슬람교도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알렉산다르 1세와 파울 왕자가 통치했을 당시의 세르비아인들의 위세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연방 수도, 중앙 정부의 주요 기관, 국영기업, 노조, 은행 등 모든 조직들이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세르비아 시대의 도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우려한 티토도 소공화국에 자치권을 주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연방 헌법을 만들었다. 중앙 정부의 견제와 함께 소공화국의 자율권 확대를 위해 헌법이 자주 바뀌었다. 1946년 이후 개정된 모든 헌법들이 이런 취지를 확실하게 담고 있었으며, 티토 또한 공산당이 지배하는 한 소공화국들끼리의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항상 문제를 야기하는 세력은 지식인, 학생, 작가, 젊은이들이었다. 티토나 카르델즈가 모색하고 있던 새로운 길과 방향이 전혀 다른 노선을 내세워 혼란을 야기했던 질라스 같은 사람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지 기반이 확실한 민족주의 이론을 앞세운 작가들을 다스리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67년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은 1840년대 크로아티아가 문예부흥 시기를 맞았을 당시 결성되었던 '크로아티아 문화연합회'를 부활시켰다.
여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운동은 늘 언어 문제에서 시작한다.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 차이는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지방 사투리나 남부 독일과 북부 독일에서 사용하는 독일어 차이만큼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150년 동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두 개 언어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펼쳤다. 1850년 세르비아의 사전 편집자 부크 카라드지치(Vuk Karadi)가 크로아티아의 지식인들을 비엔나에서 만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는 하나의 언어이지만, 두 개의 알파벳으로 사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후 크로아티아에서는 라틴 알파벳을, 세르비아에서는 키릴 문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하다가 104년이 지난 1954년 노비사드에서 다시 한번 확인 절차를 밟았다.-.쪽
혁명의 해인 1968년을 맞아 새로운 균열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반스탈린 현상이 가장 늦게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1965년 강경파 스탈린주의자 안토닌 노보트니가 권자에서 쫓겨나자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슬란스키 시대 때 재판을 통해 티토주의자라는 혐의로 처형되었던 인사들이 사후 복권이 되면서 '자유'라는 이름의 산소가 상당량 유입되었다. 1968년 1월 5일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방운동을 선보였다. 전국이 감정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공산주의자였던 두브체크와 동료들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삼갔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던 문인들이 소련과 사회주의를 공격하는데 질라스만큼이나 앞질러 갔다.-.쪽
8월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쳐들어갔다. 소수의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군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수천명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나 소련군의 탱크를 막는것은 불가항력이었다.-.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