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횡포도 싫지만 스탄린과 소련의 만행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공산주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티토가 냉전을 초래했던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비동맹, 제3세계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했던 배경이다. -.쪽
"처칠은 세계 공산주의의 적이자 우리의 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파트너를 가져야 한다면 처칠이 단연 으뜸이다. 나는 그를 여러 번 상대해봤다. 훌륭한 정치가임에 틀림없다."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뽑으라면 처칠과 티토인것 같네요.-.쪽
1980년 티토는 8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간했다.거인의 마지막 길을 마거릿 대처 수상이 끝까지 지켜봤다.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헌 양복 한 벌이 유품으로 전해졌으나 다섯번째 부인 요반카에게는 그것조차 없었다. 공산주의자의 마지막다웠다.
=>아름다운 죽음이네요.-.쪽
1792년,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혁명의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경제 현상으로까지 확산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사회가 이분화되는 것을 막고, 모든 재화를 공동 소유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 이후 5년에 걸쳐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는 여러가지 비전의 제시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 구체화되어 갔다.-.쪽
1848년 1월 브뤼셀에 살고 있던 중산층 젊은이 두 사람이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란 간단한 팸플릿을 찍어냈다. 라인란트(Rhineland : 라인강 서쪽 지역)의 진보적인 신문에 기사를 쓰고 있던 29살의 언론인 카를 마르크스와 맨체스터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독일 사람의 아들인 28살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자기들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쪽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선보였다. 일찍이 여러 사람들이 제안했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아닌 과학적 사회주의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호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필연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인류는 원시적인 공산 사회의 형태로 집단 생활을 시작했고 모든 재화 또한 공동 소유였으나, 노동이 분화되는 과정을 거쳐 소수가 주인이 되고 다수가 노예가 되는 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공동 소유에 종말을 고했다고 말했다. 노예 제도를 대체했던 봉건주의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가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상인들도 근세에는 주로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 정치권에서 자본가들을 지칭하던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은어를 그대로 이용했다. 이와 같이 한 단어의 뜻이 논란의 와중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 의미를 바꾸어 버린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쪽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봉건주의를 대체한 부르주아지의 업적을 한껏 찬양했으나, 이제 산업의 최선봉에 서 있는 공장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에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논리도 빠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거 어떤 지배 계층도 자진해서 자신들의 힘과 이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과격한 정치적인 변혁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영국의 시민전쟁과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르주아지도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독점하?있던 권력을 나눠 가지기 위한 방편으로 폭력을 이용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또한 부르주아지와 권력을 양분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층이 되면 사회주의가 터전을 잡게 되고, 계급 없는 공산주의로 순조로운 발전을 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쪽
파리코뮌, 국제노동자협회 그리고 마르크스의 원리는 티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두 가지 요인 중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발칸 반도를 수놓았던 격동의 역사이다.-.쪽
17세기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모든아이들의 생년월일이 등재되어 있는 교회의 신생아 기록부에는 티토의 생일이 1892년 5월 7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1913년 티토가 오스트리아군에 징발되었을 때 그의 병적부는 생일을 1892년 3월 5일로 기록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경찰은 그의 신상면세서에 그의 생년월일을 1892년 3월 12일이라고 적었으나 1943년 독일의 점령 당국은 3월 7일로 정정햇다. 그러나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자 5월 25일이 그의 공식적인 생일이 되어 버렸다. 파르티잔들이 처음에 그의 생일을 잘못 알고 그날 파티를 연 후 관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별다른 동기가 있어서 그렇게 사용했던것은 아닌것 같습니다.생일이 여러날이네요. 선물 많이 받겠어요. ^^;;-.쪽
"한 번은 예배가 끝난 후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신부의 집전 의상을 빨리 벗기지 못했지. 그랬더니 신부가 화를 내면서 나의 뺨을 갈기더군. 그 뒤로 나는 교회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네." 이런 씁쓸한 기억이 티토를 공산주의자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그가 가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이 어린 시절 신부가 자기에게 했던 부당한 행동을 기억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때론 어른들은 부당하게 어린이들을 대합니다. 그들이 약하고 무지하다고 말이죠. 하물면 종교인이 그런행동을 보였다는 것이 부끄럽네요. -.쪽
8일 동안 감옥에 감금된 다음 장례식에서 소란을 야기했다는 죄목으로 지방 법원에 기소되었다. 마침 담당 국선 변호사가 가톨릭을 증오하는 동방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고발한 신부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털어놓은 뒤 최선의 방어책을 알려주었다. 지방 법원이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르는 법, 이 일련의 사건이 티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6년에 걸친 포로 생활과 여행 그리고 모험과 역경을 이겨낸 티토는 크로아티아로 돌아가 좋은 일자리를 찾은 뒤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조용한 보금자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다음부터는 간헐적으로 홍보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파업에 관여하기도 했다.-.쪽
이런 과정에서 그는 흔들리는 당 지도부와 투쟁이라는 부질없는 환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이 파업을 하다가 직업을 잃고, 데모 군중들이 거리에서 곤봉에 실컷 두들겨 맞는 대가로 크렘린의 소수 지배층이 러시아의 국익만 챙기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 도대체 어떤 가치 기준으로 이런 현실을 이해했을까? 그는 당을 떠나 가족, 아내, 일에만 몰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티토는 벨리코트로이스트보에서 좋은 고용주를 만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구했었다. 그러나 이때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었다면 그가 파경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하자마자 아내 폴카가 낳은 첫아이가 죽었다. 다음해 낳은 둘째 사내아이도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이질로 죽었다. 또 그 다음해에 낳은 셋째 사내아이 힌코(Hinko)도 낳은 지 며칠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1923년에 태어난 넷째 여자아이 즈라티차(Zlatica)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오래 살았으나 역시 디프테리아로 2살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들의 운명이 하나같이 티토의 형제나 누이, 크로아티아의 오지 마을에 사는 농부의 자식들과 다를 바 없었다.-.쪽
즈라티차의 죽음이 티토를 매우 힘들게 했다. 위안을 받을 만한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최후의 승리를 믿고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 발전의 신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후에 데디예르에게 금발머리를 한 귀여운 어린 딸 즈라티차의 죽음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의 관을 가지고 공동묘지로 갔지. 내 손으로 묻었어." 여윳돈이 생기자 티토는 아이들 무덤에 묘비를 하나씩 세웠다. 1924년에 태어난 다섯번째 사내아이 자르코(arko)가 티토와 폴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중 유일한 생존자다. 좋은 직업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결혼 생활까지 순탄하고 아이들 모두가 잘 자랐다 하더라도 티토는 무미건조하고 조용한 생활에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험심이 강한데다 특출한 지도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료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과 8일간의 구금이 그에게 공산주의 선동가를 딱지를 붙였다.-.쪽
티토가 33살의 나이에 혁명전사의 길을 걷게 만들어 준 마지막 사람은 오스카 로젠버그다. 그는 유대교를 능멸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해 버리는 공산당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1942년 폴란드에서 그를 독가스실로 데려가 죽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쪽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죽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 부당한 처우, 고독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훗날 소련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죽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류의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협잡꾼 아니면 파시즘의 정보원이라고 속삭이면서 위안을 삼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사회주의의 모국 소련은 천당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럭스 호텔에서 음흉한 밤의 행사가 진행되기 이전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티토에게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 중요한 임무를 맡으라는 명령이 내린 지 6개월이 지난 1937년 봄까지 코민테른 관계자들의 숙청은 없었다.-.쪽
지금까지 만나 봤던 정치인들 중에서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는지도 물어봤다. 티토의 대답은 이랬다. "당연 처칠이지. 그는 위대한 정치가야. 물론 우리의 적이고 오랜 세월 공산주의의 적이기도 했어.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적이야. 정치가라면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런 적을 갖기를 원할 거야."-.쪽
미소간의 냉전이 도를 넘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달려가는듯 하자 티토는 중립 노선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3세계(Third World)'라고 알려진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의 좌파,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평화주의자들 수백만 명이 이 노선에 줄을 섰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미 제국주의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소련을 가능성 있는 나라로 본 것도 아니었다.-.쪽
여러가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티토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1962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민족적인 과제를 해결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공산당이 집권하여 유고슬라비아연방을 결성하기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세르비아 체트니크, 이슬람교도 파시스트들이 살육전을 벌여 100만 명에 가까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이슬람교도들을 서로 죽였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소망이 소수 민족이란 개념을 뛰어넘어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다. 정부의 홍보 담당 기관들도 이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이슬람교도를 유고슬라비아인으로 한데 묶는 데 힘을 기울였다.-.쪽
1943년 학살극과 198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인종 청소는 티토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던 시대의 비극이다. 이 45년 동안 유고슬라비아연방을 만들어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깨우쳐 줄 수 있는 사람은 티토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쪽
몇 년전에 비해 지금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티토에게 굉장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잇다. 역사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몇 년 사이에 30만면이 넘는 사람들이 도륙당하는 나라에 사는 것보다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몇몇 정치인들이 구속당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고는 하나 무차별 포격과 저격수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집 밖에 함부로 나갈 수도 없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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