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생물 시간, 완두콩의 우성·열성 인자로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멘델. 우리는 학창 시절 ‘
멘델의 법칙’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렇게 익숙했던 인물임에도 그의 출생, 인생 행로, 선구적 학자가 겪었을 법한 시련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막연히 그를 우리와 이질적인 천재로 여기고, 고교 졸업과 동시에 잊어버렸다.
그레고어 멘델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천재가 결코 아니었다. 대신 7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완두의 육종 실험을 완성한 ‘끈질긴 노동자’였다. 1822년 오스트리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은 ‘농투성이’ 운명을 거부하고 학업과 명성을 탐했다. 19세기 유럽에서 돈 한푼 없는 젊은이가 교육을 받기 위해선 수도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25살에 수도사들의 지식 습득을 장려한 성 토머스 수도원에 들어간다. 독학 끝에 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지만, 천재의 재능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발굽이 있는 동물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필기시험 문제에 ‘코끼리는 짐을 실을 수 있는 훌륭한 동물’이란 황당한 답을 달았다. 설상가상, 소심한 성격으로 구술시험에 말을 더듬어 시험을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멘델은 번뜩이는 천재성이 아닌 성실한 소걸음으로 목표에 다가간 인물이었다.
오늘날 일부 학자는 멘델을 식물 교배에 능한 아마추어 식물학자라고 폄하한다. 그의 명성은 1900년대 생물학자들이 제 이론을 내세우기 위해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더라도 7년간의 초인적인 자료 수집과 수학적 분석이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그가 수천 개의 완두콩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았다면, 유전 현상을 깔끔한 비율로 설명하는 멘델의 법칙이 도출될 수 없었다. 저자는 그가 천재인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단 그의 천재성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인간 ‘멘델’을 되살린다.
그는 눈부신 지능 대신 학문에 대한 우직한 집념으로 유전학계의 거인이 됐다. 자신이 생물학의 대명사가 될 미래를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10대 소년 시절 “내가 무덤에서 일어나면, 내 뒤에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기술이 평화롭게 번성하고 있음을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으리라”란 시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