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스 메넌드 지음, 정주연 옮김
민음사, 648쪽, 2만2000원
1872년 정초였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사랑방 모임 하나가 탄생했다. 젊은이 사이의 사교활동을 겸한 토론 모임. 문패가 꽤나 "비꼬는 투에 반항적"(265쪽)이었다. 메타피지컬(형이상학)클럽. 책의 서술대로 "무섭게 논쟁"하기를 즐겼던 클럽의 핵심멤버는 4명. 멤버의 한 서재에서 정기적으로 모였던 이 클럽은 9개월동안 굴러가다가 이내 흐지부지 됐다.
비공식 모임이니 기억할 사람도 없다. 사실 그런 클럽은 적지 않았다. 새터데이클럽, 셰익스피어클럽…. 대학이 현대교육을 떠맡기 전후의 일이니까. 35년 세월이 흘러 미국의 기호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가 자기 저술에서 그 클럽을 회고했다. 거기까지다. 다시 100년 뒤에 출현한 이 책은 대뜸 이 클럽이야말로 "오늘의 미국을 만든 사랑방"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나선다.
좀 성급하거나 과장 아닐까 싶은데, 2002년 퓰리처상 역사부문 수상작이란다. 읽고 보니 좋다. 그것도 매우 좋다. 그 클럽의 핵심멤버 4명의 삶을 차례로 담고 있는 '4인분 전기'이자, 그들 사이의 지적 교유까지 생생하게 살려낸 특급 다큐멘터리다. "프래그마티즘(실용주의)은 어떻게 탄생했나"하는 의문을 이토록 새로운 방식으로 포장 내지 구현했다는 점도 흥미를 끈다.
퍼스 외에 핵심멤버 4명은 나중에 연방대법관을 지냈던 올리버 홈스, 교육철학자 존 듀이, 그리고 그들의 친구 윌리엄 제임스. 20세기 미국이 생산해낸 거의 유일한 '철학 브랜드'인 프래그마티즘이란 용어의 탄생은 알고보니 다분히 우연이었다. 멤버 사이에 합의도 부실해 도구주의(듀이).휴머니즘(퍼스)등으로 제각각 불리웠다. 단 합의 내용은 명쾌했다.
즉 자기들의 생각은 '철학'이라기 보다는 어떤'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생각이란 것은 영원한 것도, 목숨을 바칠 만한 그 무슨 권위도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알고보면 사상.생각이란 젓가락이나 칼처럼 도구에 불과하니 피차간에 쿨해지자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고안"(564쪽)된 것이 프래그마티즘이다. 그 점에서 관용이나 문화 다양성과도 닮은 꼴이다.
프래그마티즘의 탄생 배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클럽은 남북전쟁(1861~65) 직후 결성됐다. 연방통합.노예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전쟁은 19세기 미국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상흔을 남긴 끔찍한 경험"(8쪽) 이었다. 클럽의 멤버들은 갈가리 찢겨나간 마음과 시스템을 추스릴 지적 문화 창출에 목말라 했다. 바로 그들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 프래그마티즘이다.
사려깊은 이'철학+역사'책은 묘하다. 영화'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미국 만세'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조금은 얄밉다. 동시에 부럽다. 역사의 시렁 위에 놓인 허름한 물건의 먼지를 털어내고 '밑천'을 발견해내는 알뜰한 노력이…. 또 한 켠에 드는 생각이 있다. 19세기 미국 못지않게 지금의 한국 사회야말로 프래그마티즘을 요구하고 있다는 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