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선민] 올림픽 인사이드 (원제 Olympic Turnaround)
마이클 패인 지음, 차형석.최욱상 옮김
베리타스북스, 445쪽, 1만8000원
'올림픽은 4년마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1980년대 초 올림픽이 4년마다 열리기는커녕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79년 이란 과격파 학생들의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듬해 미국을 비롯한 65개국이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고, 소련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84년
LA 올림픽에 공산권 국가들을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으르렁댔다.
비둘기가 날아다녀야 할 올림픽이 졸지에 살얼음판이 된 것이다. 게다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현금성 자산이 20만 달러밖에 안 되는 초유의 재정난에 몰려 있었다. 국제연합(UN)이 능력 없는 IOC 대신 올림픽을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서는 판국이었다. '올림픽 인사이드'는 세계 각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을 자살 행위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사면초가에 몰려 있던 올림픽과 IOC의 드라마틱한 부활 이야기다.
최근 25년간 올림픽에 얽힌 사건과 비화가 궁금하다면 이 책부터 뒤적여봄직 하다. 마침 한 달 뒤는 독일월드컵 개막. 월드컵과 함께 지구촌의 대표적인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에는 그만큼 뒷얘기가 많이 숨어있다. 대표적인 것이 "올림픽을 멸종 위기에서 구한 인물"인 사마란치가 IOC 재정 확충을 위해 도입한 방송중계권 입찰이다.
IOC는 입찰 장소를 미국이 아니라 스위스 로잔으로 정해 시차 탓에 방송사 협상팀이 본사와의 연락을 긴밀히 할 수 없도록 하거나, 입찰 순서를 동전 던지기로 정하게 해 방송사들의 허를 찌르는 식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운다. 저자가 '전갈전쟁'이라 부르는 NBC.ABC.CBS 등 미 3대 방송사의 불꽃 튀는 입찰 경쟁은 마치 첩보소설처럼 묘사된다.
막대한 광고 수입을 포기하기 힘들었던 세 마리의 '전갈'은 IOC의 '농간'에 휘말렸다는 찜찜함을 애써 무시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결국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방송중계권 협상에서 ABC는 4년 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때보다 무려 337% 오른 2억1750만 달러에 중계권을 따낸다. ABC는 "미국 스포츠 방송 사상 가장 실망스럽고 분노스러운 터무니없는 협상"을 끝내고 쓴 입맛을 다시며 비행기에 오른다. 이후 TV중계권 협상은 "고액의 판돈을 건 포커놀음"이 돼버렸다.
이 책에는 이렇듯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이 줄을 잇는다. 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비둘기들이 하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 풀려나는 바람에 입장하던 선수들 머리 위에 '실례'를 해버렸다거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기간 중 NBC가 스태프의 '마실 권리'를 존중해
스타벅스 커피 7264㎏을 본국에서 공수했다는 일화 등은 지엽적인 예에 불과하다. LA 시민의 83%가 반대하는 바람에 LA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최초로 시와 정부가 아닌 피터 위버로스라는 개인의 영리단체가 개최했다는 '올림픽 상식'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와 함께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세계의 유수한 대기업들과 '올림픽 마케팅'에 얽힌 갖가지 사례다.
'TOP 프로그램'으로 대표되는 올림픽 마케팅은 IOC가 방송중계권 입찰과 함께 재정 회복을 위해 꺼내든 회심의 카드였다. 각국의 올림픽위원회들을 단일화하고 모든 마케팅 권한을 4년간 독점 패키지로 묶는 식의 스폰서 프로그램을 만든 뒤 대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교차되는 기업들의 명암은 마케팅 참고서라고 해도 될 만큼 생생하다. "아멕스의 가슴에 비수를 꽂겠다"는 각오로 달려든
비자 카드, 발빠른 의사결정으로 코닥이 다 따놓은 올림픽 후원권을 낼름 가로챈 후지, 가격 조정을 하려 머뭇거린
모토롤라의 자리를 파고들어 결국 수 년 후 세계 이동통신시장 2위로 급부상한 삼성 등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마케팅 기법들이 당시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용됐는가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저자 마이클 패인은 사마란치 위원장 밑에서 올림픽 마케팅 프로그램 개발을 실무 지휘했다. 핵심 관계자여서인지 올림픽의 속내(인사이드)를 마치 영화 보듯 세세한 대목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지루한 '올림픽 연대기'를 예상했다면 멋지게 배반 당할지 모른다.
저자가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즈 비즈니스 이야기"라고 소개했듯 정정당당한 스포츠 정신, 그를 통한 인류 평화의 구현 등보다는 올림픽의 숨은 메커니즘과 작동 원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더 걸맞는 책이다. 한 마디로 돈 냄새가 물씬 난다. 그래서인지 꽤 재미나다.